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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8. 17.

빚의 대관식

대한민국에 대관식이 있었다.

예로부터 군주들은 부족한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대관식을 활용하기도 했고, 이를 위해 있는 세간살림을 털어넣기는 물론이고 빚을 지기까지도 했다. 하여간 동서와 고금은 서로 통하는 면이 있기 마련이다.

모든 정권이 가장 강한 추진력을 가진 첫 해년도에, 이번 정권은 빚을 상환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모두 권좌에 앉기 위해 과도하게 짊어졌던 빚이다.

이제 상환의 시간이다. 그동안 입법부에 있을 때에는 그토록 비판했던 대규모 사면을 스스로 행하는 처지가 되었다. 심지어는 일방적으로 정치적인 사면임을 너머서 그 적정성까지 의심받고 있다.

지나치게 많은 빚을 진 까닭에 도덕적 파산이냐 정치적 부도냐 말고는 선택할 길이 없게되었다. 이번 결과로 당장의 정치적 부도는 면했지만, 모든 부채를 면할 수는 없다. 도덕적 파산 역시 면하지 못했다.

자신이 지니고 있던 그 모든 자산이 자본이 아닌 부채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데 얼마나 걸릴까? 제명에 달렸다. 기한의 이익을 누리는 중에는 꿈에도 모르겠지만.

사실 기한 이익은 특약에 의해 쉽게 상실될 수 있는 종류의 권리이다. 채권자들은 정치적 부도상황을 감지하면 언제든지 실력행사에 나설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빚의 승리이자 빚의 대관식이다. 

2025. 7. 15.

항산과 청렴

맹자는 현실적인 유학자였습니다. 그로 인해 공자보다는 맹자의 글을 읽을 때 조금 더 씹는 맛을 남깁니다. 사실 이는 맹자가 절문의 화를 당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주원장은 “신하가 할 수 없는 말을 하였다“ 며 맹자의 내용을 검열하여 그 판본으로만 과거를 보기도 하였으니, 인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 말씀을 싫어했습니다.

맹자는 현실의 관점에서 항산(흔들리지 않는 재산)이 있어야 항심(흔들이지 않는 마음)도 있다고 했으니, 아래와 같습니다: 
고정적인 생업이 없으면서 항심(恒心)을 지니는 것은 오직 선비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일반 백성의 경우는 고정적인 생업이 없으면 그로 인해 항심도 없어집니다. 만일 항심이 없다면 방탕하고 편벽되고 간사하고 사치스러운 행위를 하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백성들이 죄에 빠지는 데 이른 이후에 그것을 좇아서 형벌에 처한다면, 그것은 백성들을 그물질해 잡는 것입니다. 어떻게 어진 사람이 임금의 지위에 있으면서 백성들을 그물질해 잡는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밝은 왕은 백성들의 생업을 제정해 주되 반드시 위로는 부모를 섬기기에 충분하게 하고 아래로는 처자를 먹여 살릴 만하게 하여, 풍년에는 언제나 배부르고 흉년에도 죽음을 면하게 합니다. 그렇게 한 후에 백성들을 몰아서 선한 데로 가게 하므로 백성들이 따르기가 쉽게 됩니다.
지금은 백성들의 생업을 제정해 주되 위로는 부모를 섬기기에 부족하고 아래로는 처자를 먹여 살리기에 부족하여, 풍년에는 내내 고생하고 흉년에는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래 가지고서는 죽음에서 자신을 건져 낼 여유조차 없는데 어느 겨를에 예의를 익히겠습니까? 왕께서 만일 어진 정치를 시행하려고 하신다면 어째서 근본으로 돌아가지 않으십니까?
오 무(畝) 넓이의 집 둘레에 뽕나무를 심으면 오십 세 된 노인이 비단옷을 입을 수 있고, 닭과 돼지와 개 등의 가축을 기름에 있어서 적절한 시기들을 놓치지 않으면 칠십 세 된 노인이 고기를 먹을 수 있습니다. 백 무 넓이의 밭을 농사짓는 데에 일손 바쁠 때를 빼앗지 않으면 여러 식구의 가족이 굶주리지 않을 수 있을 것이며, 상(庠)과 서(序)에서의 교육을 엄격하게 시행해 효도와 공경의 의미를 거듭해서 가르치면 머리가 희끗한 사람이 길에서 짐을 지거나 이고 다니지 않게 될 것입니다. 칠십 세 된 노인이 비단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일반 백성들이 굶주리거나 헐벗지 않게 하고도 통일된 천하의 왕이 되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은 구태여 맹자왈에서 찾을 필요 없이, 옛 성현들은 ‘곳간에서 인심난다’, ‘열흘 굶고 담 안 넘는 사람 없다’와 같은 속담으로도 인식하고 있습니다.

역사상으로도 아테네에서는 공무수행자에게 수당을 지급했고, 18세기 즈음부터는 영국과 프랑스, 미국에서 공직자에게 정기적 월급을 주었으니, 이는 일반인의 참여와 항산을 보장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한편, 조선시대의 이방에게는 고려시대까지 지급되던 녹봉이 중단되었습니다. 오히려 여러 부담만 발생하게 되었고, 이는 조선 특유의 과세제도와 맞물려 이방의 부패를 부추겼습니다.

비록 오늘날의 공무원들은 삶을 유지할 수 있는 봉급을 받지만, “돈 벌려면 기업으로 가라“는 태도는 청렴은 커녕 사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공직자들의 희생과 소명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맹자는 이런 말도 남겼습니다:
하늘이 내리는 재앙은 그래도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가 불러 들인 재앙으로부터는 살아날 수가 없다.

입은 화의 근원이고 혀는 제 몸을 자르는 칼이라고 하니, 이는 곧 스스로 불러들이는 재앙입니다.

2025. 7. 12.

스마트펙토리라는 말장난

사기꾼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에 집착합니다. 그래야 그 검은 속내를 숨길 수 있습니다.

스마트팩토리가 그렇습니다. 공장이 뭐 얼마나 똑똑한걸까요?

이럴때에는 반대로 질문합시다. 그럼 어떤 공장에는 스마트팩토리를 적용하면 안되나요?

만약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면 그것은 무의미한 단어입니다. 구태여 새로운 고유명사를 창조할 필요 없이 모든 공장이 스마트해지면 됩니다.

우리는 맞춤법 검사기를 더이상 인공지능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냥 쓰고 있죠. 기술은 이렇게 우리의 삶 속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스마트팩토리가 아니라면, 그동안 아무런 발전이 없었음을 자인함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는 아직도 스마트팩토리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똑똑한 공장이 갖추어야 할 최소 조건은 알고 있습니다.

바로 자원(혹은 정보)의 무결성과 가용성을 지키는 것입니다.

원료를 구입하고 적절한 버퍼를 유지하며 가공하고 보관 후에 출하하고 폐기물 처리에 이르기까지 모든 노드에서 말입니다.

여기서 실패하면 프로그래밍에서 말하는 뎅글링 포인터와 같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더 위험한 점은 현실에선 경고를 띄우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큰 조직일 수록 부서간 격벽, 정보의 단절, 책임의 분산 등으로 인해 이를 지키기 어렵고 심지어는 자신이 무엇을 위해 일하는지도 모를 수도 있습니다.

ERP는 오히려 이런 증상을 고착시키는 형태로 설계되곤 합니다. 전사적 자원을 아무런 고민 없이 관리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자원뿐 아니라 한 공장 내에서 다른 부서가 원하는 자원을 알지 못하면 무의미한 생산만이 반복됩니다.

자원의 무결성과 가용성은 첨단 기술만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민 기술의 발전으로 더 쉬워졌을 뿐, 경영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제인스빌 이야기를 읽고

08년도 서브프라임으로 GM은 몇몇 공장의 가동을 기약없이 중지합니다. 노동자들은 일괄적으로 해고되었고, 제인스빌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노동유연성의 힘을 과신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효율적인 자본주의적 제도라고 주장합니다. 기업이 필요할 때 해고하고 채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사회에게도 이득이라는 것이죠. 하지만 저는 이 주장을 듣고 CPU가 떠올랐습니다.

CPU는 사실 한 번에 한 프로세스밖에 처리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컴퓨터가 멀티테스킹이 가능해 보이는 것은 작은 시간단위로 쪼게서 실행하는, 시분할 스케줄링을 하기 때문이죠. 무척 효율적입니다. 그러나 그 단위를 아주 극소화 한다고 해서 성능이 늘어나진 않습니다. 왜냐하면 프로세스 사이를 오갈 때 인터럽트가 발생하기 때문이죠.

노동유연성의 맹점도 이 인터럽트에 있습니다. 직장에서 하루의 1/3을 보내야 하는 인간의 이직은 핑거스냅처럼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실제로 노동유연성이 제공하는 효율성이란 이 인터럽트 비용을 노동자에게 전가함으로써 발생합니다.

불가피한 해고는 발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터럽트 비용이 사회를 위해 발생된 것이라면, 지불도 사회가 해야합니다. 예수를 대속시키듯 노동자에게 비용을 전가하고 파산시킴으로써 도약하는 사회는 존재해서는 안됩니다.

실업자가 무너지지 않도록 돕고 원한다면 재교육을 지원하며, 이 사이의 인터럽트가 충분히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인지해야합니다. 사실, 제인스빌에서는 이보다 더 상황이 안좋았습니다. 전체 경기가 위축되면서 다른 일자리도 사라졌으니까요. 직업재교육을 받은 후에도 취업한 사람 수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자유시장주의자들의 아메리카드림은 이렇게 반례를 보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열심히 일했고 또 재교육에 나서더라도 내일을 걱정해야 하는 현실입니다. 정부가 나서야 했습니다. 주 정부는 기업 유치를 위해 단체교섭권을 약화시키는 법을 통과시킵니다. 이는 결국 주지사 소환투표로 이어지지만, 결국 주지사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게 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주지사를 지지한거죠.

사실, 노동자들의 양보가 필요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분노를 부른 것은 그 양보가 강요되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변화는 이해당사자들의 반동을 부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주 정부는 양보를 교섭하는 대신 시원하게 양보를 받아챙깁니다.

제인스빌 이야기는 제인스빌 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08년도 당시 온 미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고, 한국에서도 GM대우가 철수하면서 군산이 같은 일을 겪습니다. 우리의 이야기일 수 있었습니다. 사회는 기업의 정체성을 명확히 해야합니다. 기업이 단순히 이윤추구자인지, 아니면 사회의 구성원으로써 책임을 가지는 영리법인인지.

이 모든 일이 끝난 후, 제인스빌은 살아남습니다. 자연인은… 많이 죽었습니다.

분노세대를 읽고

이 르포타주는 게임스톱 사태의 한 가운데 있던 월스트리트벳츠라는 서브레딧의 흐름을 다룹니다.

원제는 더 트롤 오브 월스트리트입니다. 월가에는 늑대도 살고 트롤도 사는데 사람은 안 사는 모양입니다.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재미있고 걸림없이 술술 흘러가는데, 눈에 밟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인셀타령이에요.

‘여러 세대에 걸쳐 인간 사회에서 먹이사슬의 최상위를 차지했던 젊은 남성들이 언제부터인가 측정 가능한 거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젊은 여성들에게 뒤쳐지거 있다는 증거가 사회 곳곳에서 나타났다’

로 월스트리트벳츠의 탄생근거를 제시하는 부분은 르포타주로서는 주제에 맞지도 않으며, 학술적으로는 담론이 미약합니다.

특히 제이미 라는 사람의 알콜중독 원인을 ‘혈기 왕성한 젊은 남성의 몸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충동을 어떻게든 잠재우려 노력하는 과정’ 으로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적대감이 느껴질 지경입니다.

제이미는 글 초반에서 밝히듯 매너리즘한 업무와 회색빛 일상을 단조롭게 오가고 있었어요. 추후 알중치료소에서도 ‘구체적인 트라우마나 촉매를 찾을 수 없었‘ 다고 작가가 말하고 있고, 제이미는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맥시코시티로 떠나며 알콜 이야기는 사라집니다. 알콜중독은 멎어가던 삶을 유지하기 위한 몸의 항상성일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어쩌면 이 사례, 그러니까 공백에 찾아온 알콜과 같은 메커니즘은 월스트리트벳츠와 게임스톱 사태를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쥐 공원 실험과 마찬가지로요.

그것을 위해서는 책에서 전반적으로 제시되는 월가와 헤지펀드에 대한 적대감을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작가가 작중에 언급했듯 “월가에 대한 불신이 지금처럼 높았던 적이 없었습니다.”

2008년도에 20세기가 막을 내리면서, 좁게는 미국인 넓게는 전세계인의 삶에 비가역적인 상처가 남았습니다. 원인을 제공한 월가는 Too big too fail을 내세워 살아남았고, 사회는 너무 작아서 실패해도 되는 사람들을 희생시켰습니다.

그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처럼 집에서 내밀렸습니다. 챙긴거라곤 체계에 대한 불신과 배신감 뿐이겠죠. 공교롭게도 오늘날 인디언들은 ‘보호구역’ 에서 살아갑니다. 그들에게 알콜중독이 많은 이유는 그저 그네들 특유의 ’끓어오르는 충동‘ 뿐이겠죠.

이렇게 붕괴된 중산층의 삶은 공백이 되었습니다. 반지성주의, 트럼프의 약진, 대안우파와 음모론자들의 서식처입니다. 월스트리트벳츠는 그저 발현된 어느 지점이었을 뿐이죠. 아마 폐쇄시켰어도 게임스톱사태는 유사하게 일어났을겁니다.

공백이 된 페트리 위에 곰팡이는 피어났고, 촉매가 된 것은 게임스톱에 대한 헤지펀드의 공매도였습니다. 매우 반응성이 좋은 촉매였지요. 게임스탑은 어린시절의 좋은 감성을, 헤지펀드의공매도는 그걸 날려버린 나쁜 기억을 떠올렸으니까요.

결과적으로 월스트리트벳츠는 헤지펀드 여럿을 파산시킵니다. 그중 하나가 이를 시장교란행위로 SEC에 고발하면서 책에서는 이 이슈를 마무리짓습니다.

하지만 되묻고 싶습니다. 왜 이게 시장교란행위인가요? 월스트리트벳츠의 행동이 다수의 행동이기에 부당하다면, 헤지펀드의 행동은 소수의 행동이기에 정당한가요? 이러한 불공정이야 말로 사회의 균형을 지키기 위해 악덕을 불러왔던 원흉입니다.

로빈후드는 그러한 악덕에서 큰 돈의 냄새를 맡습니다. 증권이라는 개념을 마권수준으로 끌어내리고, 역사상 전례가 없는 방식으로 매수버튼을 뽑아버리면서 개미들에게 추크츠방을 강요했습니다.

서브프라임으로 돌아가서, 그러니까 아무에게나 대출을 해주고자 하는 금융기관의 탐욕은 불가피하다고 하더라도 그 사후처리가 공정했더라면 지금 이 세대는 분노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월스트리트는 트롤로 가득차있고, 메인스트리트는 여전히 비어있습니다.

동학사로 본 동학농민혁명수당

오지영이 쓴 동학사는 역사소설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사실과 다르거나 곡해한 부분이 많습니다. 본인부터가 천도교인이므로 이해당사자가 쓰는 역사란 변질될 우려가 크죠.

하지만 다르게 보면 이 책은 동학의 밑바닥을 보여주진 않겠지만, 동학의 천장 즉 아무리 미화해도 감출 수가 없었던 부분에 대해서는 알 수 있습니다.

가령 동학은 철저하게 종교적이었습니다. 오지영은 신비주의를 배격하고자 하는 입장이었다지만, 최제우가 태어나면서 구미산이 크게 울었다거나 칼로 내려쳐도 목이 베이지 않았다는 서술이 이를 보여줍니다.

특히 동학은 유교도 불교도 선교도 서학도 아니다. 라고 말하지만, “부유한 사람과 귀한 사람과 글 잘하는 사람은 도를 통하기 어렵다” 거나 “선생의 밥을 푸고도 남은 밥이 있어 10여인의 식구가 모두 먹었다” 는 구절은 성경을 떠올리게 합니다.

동학은 서학에만 의지하지도 않았는데, 창의문과 홍계훈에게 쓴 편지를 보면 전봉준은 스스로를 호남유생이라 칭했고 유교적 세계관에 입각하는 등 근왕주의적 농민반란, 즉 나랏님은 죄가 없는데 방해하는 사악한 무리를 처단하자는 논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오농민전쟁이 2020년 경까지 긍정적인 이미지로 남아있던 이유는 철저하게 동학과 농민들의 생각이 달랐고, 이로인해 동학의 문제점들이 잘 감추어졌기 때문입니다.

시발점이 된 전주, 익산, 고부의 민란은 지역적 불법수탈에 반발하여 발생한 민란입니다. 만약 동학이 없었어도 발생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충분히 타락했고 때마침 거기에 전봉준이 있었습니다.

실제로도 첫 민란 당시에는 동학의 전면적 내전이 아니었습니다. 불을 지른건 무능한 안핵사였죠. 이때부터 동학이 전면적으로 농민군의 수뇌부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농민들과 동학의 괴리된 목표는 해소할 수 없었습니다.

농민들은 그저 먹고살길 바랬습니다. 한울님이나 인시천 사상은 알빠 아니겠죠. 확신도 없었습니다. 아마 피의 일요일 당시의 러시아백성들과 같은 생각이었을겁니다.

나라가 어찌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동학도들의 것이죠. 신화적 존재인 전봉준이 부상을 입고 기세가 기울자 농민군은 엄청난 속도로 탈주합니다.

결국 우금치 고개에서 갑오농민전쟁은 막을 내립니다. 관군과 일제에 의해 수많은 조선인이 목숨을 잃은 비극이었습니다. 하지만 비극이 권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동학운동과 농민운동이 이토록 혼재되어있기에 평가는 힘이 듭니다. 그래서 2020년 경 부터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수당’ 에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관련 조례를 보면 1. 복지 향상 2. 동학농민혁명 정신 선양사업으로서 수당을 지급한다고 합니다. 복지향상이 선양사업보다 앞서 위치한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또 동학농민혁명 정신은 무엇인가요? 그 수당은 동학도로서 받는건가요 아니면 농민으로서 받는건가요? 이것들을 대답하는데 실패했기에 논란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창의문을 발표할 때, 오지영에 따르면 이런 외침이 백성들 사이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이놈의 세상은 빨리 망해야 한다“, ”어느쪽이 죽던지 어서 얼른 결딴이 나야한다“

지금도 정치를 똑바로 하지 못하면 우리 후손들은 또 수당을 지급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2025. 7. 3.

초겨울 앞에 선 배짱이의 불안

(2023. 03. 14.)

겨울은 춥다. 나무는 잎을 떨궈 긴 추위를 대비한다. 다년생 식물은 화분째로 비닐하우스 안으로 들어간다. 그렇다면 노지의 일년생 식물은 어떻게 겨울을 나야할까?

더위를 먹은 사람들은 냉철하게 상황을 파악하는데 실패하고 계속해서 한여름밤의 꿈을 꾸어왔다. 곧 연준이 피벗할 것이다 -> 금리가 딱 알맞은 골디락스가 올 것이다 -> 연착륙에 성공할 것이다, 같은 식으로 말이다. 심지어는 SVB가 파산하고 다른 은행들도 의심받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을 볼모로 잡고 ‘금리를 내려야 한다’ 고 주장한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사태의 정상화가 아니다. 그저 금리를 휘어잡아 주식시장의 예정된 파멸을 늦추기 위함일 뿐이다.

현재 시장은 양각에 잡혔다. 금리를 올리면 더 많은 파산이 예정되어있고, 금리를 내리면 연준은 신뢰를 잃을 것이며 인플레이션은 더 강하게 시장을 옥죌 것이다. 양각이 잡히면 망설이지 말고 한 쪽으로 돌진해야 한다. 고민은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키고, 차후에는 몰려죽는 것 말고는 아무런 선택지를 남기지 않는다. 선택지를 ‘선택’ 할 수 있을때 하는 선택이 진정한 선택이다.

비행기에 탄 상태에서는 착륙을 낙관할 수 밖에 없다. 그 자신이 볼모이기 때문이다. 사실을 알고 싶으면 한 발 떨어져서 봐야 한다. 이 경우에는 고도가 10km 정도 낮은 대지에 발을 붙이고 바라보아야 정확히 알 수 있다. 정배는 금리 인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례업의 호황은 예정되어있다. 여름이 평생 갈 줄 알았나?

일본이 버블경제 당시에 지었던 인프라스트럭쳐(특히, 우수처리시설)는 여전히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낮은 자본조달비용 덕분에 저렴하고 훌륭하게 지을 수 있었고, 앞으로도 그들은 수십 년에 걸쳐 혜택을 볼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 여름에 할 일이었다. 땅지랄을 하거나 록펠러센터를 사는 것 말고 말이다.

앞서 일년생 식물의 겨울나기를 물었다. 얼어죽는 것이 자연의 순리다. 겨울에 내린 눈이 얼고 녹으며 일년생식물의 줄기를 연화시킬 것이다. 먼 훗날 봄이 오면 일년생식물은 쓰기 좋은 자연퇴비가 된다. 이것이 유기농이다. 잡초 살리려고 이상고온을 바랄 수는 없지 않은가?

2025. 6. 19.

힐빌리의 노래를 읽고

힐빌리(Hillbilly)는 깡촌을 뜻한다. 특히 ‘러스트 벨트’ 라는 쇠락한 제조업 지대와 그곳의 거주민들을 뜻하는 말이다. 책의 저자인 J. D. 밴스는 여기서 자랐다. 암울하기 그지 없는 성장배경을 딛고 일어나 자수성가에 성공한 화자의 일대기는 감동스럽다. 하지만 이 책이 한국에서 유명세를 탄 이유는 저자가 `24년 대선에서 공화당 부통령후보로 출마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이상 밴스의 자서전은 오직 개인의 자서전으로만 단순히 읽힐 수는 없다. 그렇다면 화자가 읊는 엘레지(Elegy), 슬픈 노래에 귀를 기울여 보자.

화자가 제시하는 와이트 트래쉬(White trash)의 서사이다. 비교우위와 자유무역에 따른 분업은 세계화를 만나 예상 밖의 화학반응을 일으켰다. 선진국에 있던 제조업은 더 낮은 임금을 찾아 후진국으로 빠져나갔다. 물가는 낮아지고 기업의 이윤은 치솟았다. 하지만 제조업에 종사하던 중산층은 무너졌고, 그 분노는 사회의 무관심과 소외속에서 정당성을 얻었다. 밴스는 그저 그 슬픈 곡조를 하나로 조율했을 뿐이다.

저차산업이 흥하고 고차산업이 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미국 예외는 없다. 실리콘밸리에서는 혁신이 일어나고 세상의 모든 돈은 월가로 모인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희생시킨 공동체의 일원들을 잊고 말았다. 그렇게 방치당한 뒷방에는 이제 그들이 흘렸던 땀과 지금 흘리는 눈물이 흘러 습기로 가득차고 곰팡이가 피어나는 것이다. 대안우파라는 검은 곰팡이가 아니더라도, 설사 지금 곰팡이를 박멸하더라도. 문제의 원인을 해결하지 못하면 또 다시, 혹은 또 다른 곰팡이가 피어날 것이다. 뻔한 일이다.

약물과 자괴감이라는 곰팡이 슬은 힐빌리에서 화자는 연꽃처럼 일어났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은인중 단 한 명이라도 없었더라면 지금의 자신은 없었을 거라며 이 행운에 대해 겸손을 잃지 않는다. 그렇다면 화자는 힐빌리의 마약중독자들과 복지여왕(Welfare queen, 복지제도를 악용하는 사람)의 불운을 비난할 수 있을까? 물론 사람의 삶이라는 것은 자신의 선택만으로 사는 것도 아니고 외부의 환경만으로 사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선택의 댓가를 엄히 물게 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공평한 환경을 제시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형사재판에서 양형요소를 제시하는 이유이다.

혹자는 화자을 혹평하며 아직도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난한다. 나는 이런 견해에 반대한다 모두에게 트라우마가 있으며 이는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용을 마약중독자와 복지여왕에게도 보이고싶다. 이들이 다시 일어날 때 까지. 유능한 변호사와 훌륭한 밴처사업가가 진흙탕에 박혀있는 사회는 모두에게 비참한 사회다. 하지만 지금 화자의 정치적 행보는 이들에게 기회를 주자는 건지, 아니면 불운에 댓가를 청구하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교육과 기회는 공평한 승부를 위한 최소한의 매너다.

J. D. 밴스가 부르는 노래가 올챙이 시절을 잊어버린 개구리의 울음에 그쳐서는 안될 것이다.

2025. 6. 17.

열린매듭과 그 적들

학생때에는 옳고 그르다에 대한 확신이 지금보다 더 많았는데, 배우면 배울수록 확신의 너비는 줄어들지만 깊이는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이 복잡한 현대사회에서는 무조건 옳거나 그르다 단정지어선 안됩니다. 이해당사자들의 매듭은 오로지 한가닥 한가닥 조율하는 방법 뿐입니다. 그러고 나서야 이해합니다. 아 이것은 열린매듭이었구나

정확히 알지 못하기에 우리는 관용합니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관용합니까? 자유는 대답합니다. 자유의 적에게 자유는 없다고. 관용도 그렇습니다. 관용의 적에게 관용할 수는 없습니다.

저에게도 앞으로의 사회가 이랬으면 좋겠다는 바램은 있지만, 상술한 바와 같이 그러한 사회가 좋겠다는 확신은 없습니다. 다만 어떠한 사회가 좋지 않은가 에 대한 확신은 있습니다.

법을 수단으로 사용하고, 민주적 정당성은 추인의 대상화 하며, 공화국에 새로운 소유권을 주장하는 사회는 좋지 않은 사회입니다. 각 품성을 스스로 무너뜨리기 때문에 용인할 수 없습니다.

비로소 열린매듭의 적들은 닫힌매듭이라고 확신합니다.

250509

두 여인이 한 아이를 두고 솔로몬에게 간 까닭은 솔로몬에게 판단할 수 있는 권한과 합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옳고 그름이 명백하여 단지 사법부의 공인을 얻는 사건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당사자들은 각각 주관적인 타당성을 가지고 판단을 요청하며, 그중 일부는 거대한 뇌관이기까지 합니다.

사법부는 분쟁의 옳고 그름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권한이 있고 공동체는 그 절차에 순종하기로 합의했기에 사법제도가 존속합니다.

분쟁의 당사자가 판결에 반해 끝까지 자신의 주장만을 강요한다면 제도 존속의 의의는 없으며, 무슨 수단으로든 당사자 일방을 침묵시켜 분쟁을 끝내는 방법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야만의 시대입니다.

반우파투쟁-공산주의의 아포톱시스

1957년, 마오쩌둥은 반우파투쟁을 일으켰다. 국가와 당 내부에 있는 우파를 색출하여 처단하기 위함이었다. 신기한 일이다. 8년에 걸친 가혹한 집산화와 프롤레타리아독재를 거친 후에도 색출해야 할 우파가 남아있다는 사실은.

니콜라이 부하린은 뜨로쯔끼주의 우익분파로 사형당했다. 그 혐의는 레닌과 스탈린을 암살하려 했고 고리키를 암살하는데에는 성공했으며 결국에는 제국주의 국가에게 영토를 넘기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렇게 믿지 않는다. 최소한 스탈린 사후, 지금은 말이다.

합리적인 관점에서 부하린의 죄목은 다음과 같다: 스탈린 동지에 반대한 죄. 부하린은 유물론자가 아니었으며, 신경제정책이라고 불리우는 집산화의 반대편에 서 있던 자였다. 물론 부하린의 죽음으로 숙청이 끝나진 않았다. 국가와 당 내부에는 아직 죽어야 할 우파가 많이 있었으며, 많이 태어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숙청이 언제 끝날지 묻는 것은 마치 언제 나무치기를 그만 둘 것인가 묻는 것과 같다. 곧 그칠 것이나, 내년 봄에 계속될 것이다. 공산주의는 인간을 분재로 만드는 체제이다. 가지를 치거나 키우는 무형의 규칙이 있어 이에 따라 인공적인 형상을 만들어낸다. 인민의 자유란 결국 자연으로부터의 자유에 지나지 않는다.

끝까지 혁명적 자세를 유지하지 못 하는 사람은 결국 숙청당할 것이다. 무엇이 혁명적인지는 지금 묻지 말라. 서기장께서 거대한 복수와 격노로 내려칠 때에야 무엇이 혁명적인지 알게 될 것이다.

반우파투쟁은 영원히 반복될 것이다. 세상에는 자기홀극이 없는 것 처럼, 자석의 한쪽 끝을 제거해도 항상 또 다른 극성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단두대는 단 한 대에 그치지 않는 법이다.

다수결의 함의

블록체인에는 ‘51% 공격’ 이라는게 있다고 합니다. 해시레이트의 과반만 확보하면 네트워크의 공정성을 붕괴시킬 수 있다는거죠. 다수결의 악용입니다.

의회에서는 그동안 51% 공격이 성립하지 않았습니다. 다수당은 분명 엄청난 혜택을 누리지만, 다수결 메커니즘에도 불구하고 협치로 유도하는 관례가 있어 완전히 압도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법사위원장 선출 관례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원내 2당 또는 야당에게 배분하므로써 정부와 여당을 견제할 수 있게 합니다.

그래서 여당의 의석이 2/3에 육박하는 상황에서 법사위원장까지 다시 여당의 손으로 들어가는 것이 참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단순한 배분의 문제를 넘어서 야당은 존재 이유를 잃게 됩니다.

비록 현재 2당이 무능하고 부패했으며, 심지어는 위헌적인 내란행위에 휘말려 해산당할 위기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시소의 균형은 똥물로도 맞출 수 있는 법이지요.

존 스튜어트 밀은 말했습니다:
게다가 인민의 의지라는 것도 엄밀히 말하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사람들이나 가장 활동적인 일부 사람들, 다시 말해 다수파 또는 자신을 다수파로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사람들의 의지를 뜻한다

민주주의가 곧 다수의 지배는 아닙니다. 다수결은 의사결정에 있어 최후의 수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1% 공격이 성공하고, 또 그 집단을 ‘활동적인 일부 사람들’이 좌우하는 분할정복에 성공한다면 그것은 과두제로 가는 길입니다.

2025. 6. 16.

스포)클레르 옵스퀴르 후기

0. 갈드컵 금지
세상에 가장 작품을 많이 남긴 화가는 누구일까? 14만여점의 작품을 남긴 파블로 피카소로 알려져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을 남긴 화가는 누구일까? 이제부터 파블로프도 기겁할 개싸움이 시작될것이다. 왜냐하면 객관적 정렬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정량적 기준과 정성적 기준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정성적 기준으로는 정렬할 수 없다. 그러니 마엘과 베르소는 붓을 놓고 이 게시글을 떠나주길 바란다.


1. 클레르 옵스퀴르
이 게임의 제목은 명암의 대비를 나타내는 미술 기법에서 왔다. 여기서부터 기립박수를 보내고 싶은데, 제작진은 정말 훌륭한 미스디렉션을 통해 제목의 의미를 잊게 만들었다.

클레르 옵스퀴르에서 어둠 없이는 빛도 힘을 잃는다. 하지만 화려한 뤼미에르와 슬픈 소피의 죽음을 통해 어둠으로 인식되는 페인트리스는 클레르 옵스퀴르의 한 축이 아닌 아닌 제거의 대상으로 인식된다.

그런 연유로 3막이 시작되며 나는 놀라지 않았다. 빛이 어둠을 잃었지 않는가? 하지만 이야기가 더 진행되면서 클레르 옵스퀴르의 의미는 빛과 어둠이 대등하기 보다는 착취적 관계임이 밝혀진다. 어둠은 단지 색체를 강조하기 위한 객체에 불과했다. 실제 삶이라고 여겨진 회화 세계가 데샹드르 가문의 갈드컵을 위한 어둠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2. 마엘엔딩
클레르 옵스퀴르에서 어둠은 의도적으로 배치된 객체이다. 그래서 엔딩은 플레이어에게 묻고있다: “정말로 이 어둠뿐인 뤼미에르가 좋은가, 아니면 불에 그슬렸지만 빛의 도시가 좋은가?“ 마엘엔딩은 어둠을 선택한다.

베르소의 영혼은 영원히 고통받는다. 이는 게임의 시대적 배경인 벨에포크 시대와 연결되어있다. ‘아름다운 시절’ 로 기억되는 서유럽의 찬란한 삶은 사실 식민지 착취와 불평등이 있었기에 강조되는 삶이었다. 이것이 바로 클레르 옵스퀴르다.

한편 이 엔딩에서는 어둠의 과잉으로 이어진다. 클레르 옵스퀴르에서, 어둠뿐인 그림은 결국 아무런 색체도 남기지 않는다.


3. 베르소엔딩
반면 베르소엔딩에서는 불에 그슬린 빛의 도시로 돌아가며 이야기에 마침표를 찍는다. 마엘엔딩이 결국 어둠에 침식당하는 내용이라면, 여기서는 결국 빛에 침식당한다. 이 게임이 갈드컵을 불러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용도를 다한 어둠은 결국 빛을 위해 폐기당한다. 뤼미에르는 원망속에 사라진다. 쾌락을 위해 낳은 생명을 속죄하기 위해 낙태할 수 있는가? 하지만 뤼미에르의 삶 역시 의도하진 않았지만 베르소를 착취한 것이었다. 이야기속의 이야기, 미장아빔이다.

그렇지만 의문은 계속된다. 뤼미에르는 베르소를 착취했고, 데샹드르는 뤼미에르를 착취했다. 우리는 데샹드르를 착취하지 않았는가?


4. 갈드컵 금지
클레르 옵스퀴르란 결국 착취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엔딩은 플레이어에게 묻는다: “당신은 어떤식으로 착취하기를 바라는가?” 이러한 질문 속에서는 하나의 행복과 상응하는 비통이 남기에 어느쪽이든 씁쓸한 맛을 남길 수 밖에 없다. 의도된 어둠이다.

하지만 단색의 화폭은 쉽게 잊혀지고, 대비된 색체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성공한 작품이다.

2025. 6. 5.

합구필분 분구필합

오늘날에도 삼국지연의가 고전으로 남아있는 까닭은 바로 훌륭한 문체에 있을 것이다. 천하대세 분구필합 합구필분. 십팔사략과 수호지가 가지지 못한 것이 있으니 바로 이것이다.

수천년 전, 나관중이 적어내린 이 구절은 오늘날 곱씹을 맛이 있다. 합구필분이라 하였으니, 오랫동안 합해져 있던 것은 반드시 나뉘게 된다고 한다. 나는 이 짧은 단어를 혀에 굴리며 삼권분립의 맛을 느꼈다.

태고적에는 모든 권력이 지배자의 것이었다. 하지만 체제의 무능은 문명의 진보속에 모습을 드러냈고, 권력은 필연적으로 나뉘게 되었다. 영국에서는 1688년 권리장전, 프랑스에서는 1789년 대혁명을 계기로 권력은 완전한 분립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에서 국가에는 세 가지 권력이 있다고 주장했다-입법권, 집행권, 재판권. 그가 말한 '재판권이 입법권이나 집행권과 분리되지 않는다면, 자유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는 확언은 현대문명으로 나아가는 청사진이었다.

고대 로마에는 이러한 청사진이 없었고, 그들은 삼두정을 도입했다. 삼권은 분리되지 않았고 그냥 지배자가 세 명이었다. 옥좌 하나에 세 엉덩이를 두었으니 결국 파멸하고 말았다. 오늘날에는 중국마저도 삼권분립을 주장하나, 그것은 공산당 우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형식적 분립에 그친다.  

이것이 몽테스키외가 발견한 사실이었다. 권력은 단순히 분리될 뿐만 아니라 서로 견제해야 한다. 국가 작용의 핵심적인 세 부분은 반드시 나뉘어야 하며, 분립하더라도 같은 지휘봉 아래에 있다면 분립의 벽은 행정상의 파티션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독재자들은 그런 지휘봉을 차지하려 들었다. 히틀러내각의 민족사회주의노동자당은 1933년 총선에서 압승했음에도 단독과반에 이르지 못하자 수권법을 통과시킨다. 행정부에 입법권을 부여하는 내용이었다. 용도를 잃은 나머지 정당은 전부 해산당한다.

이듬해인 1934년, 히틀러는 장검의 밤을 통해 돌격대를 몰살시켰다. 하지만 아무도 이를 기소할 수는 없었다. 이미 사법부는 판단할 능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법학자가 "정치적 결단은 법적 정당성보다 우위에 있다" 며 법적인 근거를 제공하기에 이르른다. 히틀러는 지휘봉을 차지한다.

이것이 삼권분립의 퇴행이며, 몽테스키외가 경계한 것이다. 결국 독일인들은 자유를 잃었고 세계는 교훈을 얻었다. 분립된 삼권이 가까워진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작은 균열조차 분립의 벽을 무너뜨릴 수 있다. 모름지기 정복은 나누어 이루어지며 풀은 한 줌씩 뽑히는 법이기 때문이다. 

허나 나관중은 또한 분구필합이라 하였으니, 백년 조금 부족한 시간이 천하에게는 충분히 길었단 말인가?

2025. 4. 4.

12.12 판례로 보는 12.3 내란

형법에서는 내란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함:

제87조(내란) 대한민국 영토의 전부 또는 일부에서 국가권력을 배제하거나 국헌을 문란하게 할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킨 자

1. 국가권력을 배제할
(OR)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킨 자
2. 국헌을 문란하게 할

여기서 ‘국헌문란’ 은 대법판례에서 잘 해석해줬음:

[8] 형법 제91조 제2호에 의하면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을 강압에 의하여 전복 또는 그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을 국헌문란의 목적의 하나로 규정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한다'고 하는 것은 그 기관을 제도적으로 영구히 폐지하는 경우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고 사실상 상당기간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을 포함한다.

이번 내란 과정에서 선관위는 따이고 국회는 봉쇄당한 상태에서 특수부대에 침입당했는데

아무도 안 다친 두 시간 짜리 내란이 어디있냐는 항변과 달리 내란죄는 국헌문란을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킨 죄 임:

[17] 내란죄는 국토를 참절하거나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폭동한 행위로서, 다수인이 결합하여 위와 같은 목적으로 한 지방의 평온을 해할 정도의 폭행·협박행위를 하면 기수가 되고, 그 목적의 달성 여부는 이와 무관한 것으로 해석되므로, 다수인이 한 지방의 평온을 해할 정도의 폭동을 하였을 때 이미 내란의 구성요건은 완전히 충족된다고 할 것이어서 상태범으로 봄이 상당하다.

그러므로 그러한 목적이 있었는지를 판별해야 하는데, 이는 아래와 같이 재판부의 판단영역임:

[11] 국헌문란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는지 여부는 외부적으로 드러난 행위와 그 행위에 이르게 된 경위 및 그 행위의 결과 등을 종합하여 판단하여야 한다.


이제 후단의 ‘폭동’ 에 대하여 봐야 하는데, 이역시 판례에서 설명해둠:

[12] 내란죄의 구성요건인 폭동의 내용으로서의 폭행 또는 협박은 일체의 유형력의 행사나 외포심을 생기게 하는 해악의 고지를 의미하는 최광의의 폭행·협박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를 준비하거나 보조하는 행위를 전체적으로 파악한 개념이며, 그 정도가 한 지방의 평온을 해할 정도의 위력이 있음을 요한다.

그런데 1980. 5. 17. 당시 시행되고 있던 계엄법 등 관계 법령에 의하면, '비상계엄의 전국확대'는 필연적으로 국민의 기본권을 제약하게 되므로, 비상계엄의 전국확대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국민에게 기본권이 제약될 수 있다는 위협을 주는 측면이 있고, 민간인인 국방부장관은 지역계엄실시와 관련하여 계엄사령관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지휘감독권을 잃게 되므로, 군부를 대표하는 계엄사령관의 권한이 더욱 강화됨은 물론 국방부장관이 계엄업무로부터 배제됨으로 말미암아 계엄업무와 일반국정을 조정 통할하는 국무총리의 권한과 이에 대한 국무회의의 심의권마저도 배제됨으로써, 헌법기관인 국무총리와 국무위원들이 받는 강압의 효과와 그에 부수하여 다른 국가기관의 구성원이 받는 강압의 정도가 증대된다고 할 것이며, 따라서 비상계엄의 전국확대조치의 그와 같은 강압적 효과가 법령과 제도 때문에 일어나는 당연한 결과라고 하더라도, 이러한 법령이나 제도가 가지고 있는 위협적인 효과가 국헌문란의 목적을 가진 자에 의하여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는 경우에는 비상계엄의 전국확대조치가 내란죄의 구성요건인 폭동의 내용으로서의 협박행위가 되므로 이는 내란죄의 폭동에 해당하고, 또한 그 당시 그와 같은 비상계엄의 전국확대는 우리 나라 전국의 평온을 해하는 정도에 이르렀음을 인정할 수 있다.

대법원은 내란의 구성요건인 폭동을 최광의, 그러니까 아주 넓게 판단하고 있음.

5.17 계엄당시에는 계엄 자체를 전국의 평온을 해치는 폭동으로 인식했고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의 심의권을 박탈하고 강압했다고 보고 있음.

이것들이 제도상 당연하게 부수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국헌문란 목적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경우 협박행위가 된다고 봄.


설사 이 모든 것이 통치행위라 하더라도, 사법부는 내제적으로 판단을 하지 못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판단을 자제할 뿐임:

[14] 대통령의 비상계엄의 선포나 확대 행위는 고도의 정치적·군사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행위라 할 것이므로, 그것이 누구에게도 일견하여 헌법이나 법률에 위반되는 것으로서 명백하게 인정될 수 있는 등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라면 몰라도, 그러하지 아니한 이상 그 계엄선포의 요건 구비 여부나 선포의 당·부당을 판단할 권한이 사법부에는 없다고 할 것이나, 비상계엄의 선포나 확대가 국헌문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행하여진 경우에는 법원은 그 자체가 범죄행위에 해당하는지의 여부에 관하여 심사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헌법재판은 형사상 내란죄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의 헌법수호의 의지를 판단하는 재판임.

형사상 내란죄 처단을 피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숨어버리거나 선동하는 행위는 그러한 판단에 좋은 영향을 줄 수는 없을것임.


결론) 8:0 인용

뇌피셜) 아마 재판관들은 12.4일에 눈 뜨자마자 결론 내렸을거임. 단지 대체 무슨 마약을 했길래 이런 생각을 했는지 알아야 했을 뿐…

2025. 1. 3.

20250103

 괜히 법학사 땄다. 법이 이토록 주먹보다 멀줄이야...

아무리 의문이 들더라도 엄연히 사법부가 영장을 발부한 만큼, 그 효력은 차후에 다툴 일이지 집행 자체를 거부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약 피의자가 직접 형사절차를 판단하여 가부를 논할 수 있다면 사법부는 왜 존재하는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사법부가 무의미하다면 검찰의 기소 역시 공허한 주장을 제기할 뿐이다.

더욱이 사법고시를 통해 검찰총장에 이른 대통령 출신 피의자의 방어전략이 치열한 법리다툼이 아닌 두문불출에 있다면 사법체계에 대한 신뢰는 어찌되겠는가?

무너진 경제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살아날 수 있지만, 무너진 신뢰는 어찌 회복할 수 있을까. 법이 그저 수저와 같은 도구가 아님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

공동체가 난도질당하고 있다.

2024. 12. 17.

20241217

 탄핵소추안은 가결되었다.

충격적인 수치였다. 나는 당초 무기명투표시 230표 이상으로 가결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실제 찬성표는 204표. 이탈표는 10표 남짓이었다. 나는 국민의 힘 의원들에게 크게 실망했다. 당당하게 일어서는 것 까지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익명에 숨어서까지 이토록 비겁할줄은 몰랐다.

지금까지는 정당해산의 보충성등을 들어 무척 어려운 시나리오라고 생각했지만, 이와 같은 비협조와 대통령의 헌정파괴에 대한 추인을 보면 점차 업보를 쌓아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특히 친위쿠데타 자체가 적법하다는 듯한 행동은 충격적이었다.

이로서 오래된 군사독재세력이 멸족당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들이 자유 민주주의 세상을 거닐기에는 너무 비좁은 것이다.

2024. 12. 8.

20241208

탄핵 결의안은 통과되지 않았다.

미래가 감이 잡히지 않는다. 12.3 친위쿠데타는 정치적 판단의 대상이 아니었다. 헌정질서에 대한 치졸한 급습이었다. 그런데 이 것이 정치적 논리로, 이해득실 계산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 믿겨지지가 않았다.

업보는 사라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막대한 댓가를 치루고 아주 조금 미룰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여당이 탄핵안 통과를 두려워 해야할 것이 아니라, 탄핵안 부결을 정말로 두려워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말하자면, 대체 어쩌려고 이러는가?

아닌 밤중에 목에 칼이 겨누어졌던 대다수의 국민들은 배임에 분노하고 있다. 피해자들은 이것을 단지 법대로 하자고 할 뿐인데, 이토록 몸서리친다면 대체 어떻게 해주기를 원한단 말인가? 이 처참한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것은 국민 뿐만이 아니다.

내일 시장이 열리면 환율은 1,450원을 내어줄 수 있다. 사실 환율이 문제가 아니다. 아무도 가장 큰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 나라에는 작은 약속이라도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신용 없이 자본주의는 커녕 사회조차 성립할 수 없다.

세계질서가 급변하는 이 엄중한 시기에 외환에 대처해야 할 사회적 자원을 내우에 모조리 쏟아부어야 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심지어는 그러고서도 내부의 근심은 계속되고 있으니 앞이 보이지 않는다. 

사방 국경 안이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으니, 어찌 해야 하는가?

2024. 12. 4.

20241204

자고 일어나보니 세상이 360도 뒤집어져 있었다.

평소처럼 잠에 거나하게 취해 뉴스를 듣고 있자니 윤석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느때와 다름없이 반국가세력을 운운하는 WWE가 한창이었다. 고작 그런 내용으로는 이른 아침의 화이트노이즈 이상의 평가를 받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계엄을 선포하는 UFC로 넘어가자 진짜로 머리에 입식타격을 당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꿀잼사태가 벌어진 동안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다. 혹자는 '왜 세상 재미있는 일은 다 밤에 일어날까?' 하고 탄식했는데 지금 내 심정이 그렇다. 자고 일어나보니 계엄을 선포했다 해제 결의를 맞고 모든 사태가 끝난 상황이었다. 5.16 당시 소시민의 심정이 이랬을까?

지금 이 순간까지도 머리속에서 이 일이 정리가 되지 않는다. 아마 어떻게 이 사건이 일어난건지 줄줄히 설명할 수는 있어도, 왜 이 사건이 일어난건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세상에 양자역학과 12.3 친위쿠데타를 이해한 사람은 없다고 봐도 좋겠다.

간 밤의 사건은 명백한 친위쿠데타였다. 하지만 명분은 낡은 군사정권의 논리였고 그 계획은 파멸적으로 어설펐다. 이번 일을 계기로 군사정권의 환상에 기생해 사는 오랜 것들은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으로 생각한다.

지난 날까지 탄핵은 근거없다고 믿어왔는데 이번 일은 명백하다. 탄핵은 이루어질 것이고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설사 탄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기사회생의 전환점이 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까, 사망신고를 해야만이 시체인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 말도 안되는 사건에 사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내 말은. 대체 이 일을 교과서에서 무어라 말해야 하는가? 아이들에게 어떻게 말하든 납득 대신 부끄러움만 남을텐데.

2023. 11. 22.

일지, 시작.

나는 일기를 쓰는 재주가 없다.

방학숙제 목록에 일기가 끼어있으면 그게 참 고역이었다. 매일 쓰면 되지 않냐고? 나는 일기를 쓰는 재주가 없다.

이러한 이유로 개학이 목전에 닥치면 나는 달력을 꺼냈다. 그리고는 날짜에 맞는 이야기를 한 세 줄 정도 지어내는게 일기의 실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부터 소설 쓰는 재주는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초등학교 저학년을 벗어나면서  일기쓰는 숙제는 사라졌다. 천만다행이었다. 그 후로 내가 일기를 쓰는 일은 없었다.

그러니 십수년이 지나 다시금 일지를 쓰는 일이 참 기괴할 따름이다. 여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 판단에 마일스톤이 필요했다. 최근 불명확한 인지도식을 통해 매매에 실수를 했는데, 이는 명확하게 문자로 보면 막을 수 있는 실수였다.

둘, 생각보다 내 기억력이 좋지 않다는 사실이 재차 확인되었다. 이건... 사례가 너무 많아 언급할 수 없다.

셋, 블로그를 좀 제대로 굴려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가다간 스페머조차 오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고로 일지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헌데 평범한 개잡부의 삶이라는 것이 매일매일 버라이어티할 수가 없다. 사실 지금도 뭘 써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아마 매일의 일지는 수기로 남기고 주말에 총평을 남기는 식으로 가지 않을까 싶다. 그러면 일지는 아니겠구나, 끽해야 주기일 것이다. 그럼 이 라벨은 일지에서 주기율표로 고쳐야겠다.

언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