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영이 쓴 동학사는 역사소설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사실과 다르거나 곡해한 부분이 많습니다. 본인부터가 천도교인이므로 이해당사자가 쓰는 역사란 변질될 우려가 크죠.
하지만 다르게 보면 이 책은 동학의 밑바닥을 보여주진 않겠지만, 동학의 천장 즉 아무리 미화해도 감출 수가 없었던 부분에 대해서는 알 수 있습니다.
가령 동학은 철저하게 종교적이었습니다. 오지영은 신비주의를 배격하고자 하는 입장이었다지만, 최제우가 태어나면서 구미산이 크게 울었다거나 칼로 내려쳐도 목이 베이지 않았다는 서술이 이를 보여줍니다.
특히 동학은 유교도 불교도 선교도 서학도 아니다. 라고 말하지만, “부유한 사람과 귀한 사람과 글 잘하는 사람은 도를 통하기 어렵다” 거나 “선생의 밥을 푸고도 남은 밥이 있어 10여인의 식구가 모두 먹었다” 는 구절은 성경을 떠올리게 합니다.
동학은 서학에만 의지하지도 않았는데, 창의문과 홍계훈에게 쓴 편지를 보면 전봉준은 스스로를 호남유생이라 칭했고 유교적 세계관에 입각하는 등 근왕주의적 농민반란, 즉 나랏님은 죄가 없는데 방해하는 사악한 무리를 처단하자는 논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오농민전쟁이 2020년 경까지 긍정적인 이미지로 남아있던 이유는 철저하게 동학과 농민들의 생각이 달랐고, 이로인해 동학의 문제점들이 잘 감추어졌기 때문입니다.
시발점이 된 전주, 익산, 고부의 민란은 지역적 불법수탈에 반발하여 발생한 민란입니다. 만약 동학이 없었어도 발생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충분히 타락했고 때마침 거기에 전봉준이 있었습니다.
실제로도 첫 민란 당시에는 동학의 전면적 내전이 아니었습니다. 불을 지른건 무능한 안핵사였죠. 이때부터 동학이 전면적으로 농민군의 수뇌부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농민들과 동학의 괴리된 목표는 해소할 수 없었습니다.
농민들은 그저 먹고살길 바랬습니다. 한울님이나 인시천 사상은 알빠 아니겠죠. 확신도 없었습니다. 아마 피의 일요일 당시의 러시아백성들과 같은 생각이었을겁니다.
나라가 어찌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동학도들의 것이죠. 신화적 존재인 전봉준이 부상을 입고 기세가 기울자 농민군은 엄청난 속도로 탈주합니다.
결국 우금치 고개에서 갑오농민전쟁은 막을 내립니다. 관군과 일제에 의해 수많은 조선인이 목숨을 잃은 비극이었습니다. 하지만 비극이 권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동학운동과 농민운동이 이토록 혼재되어있기에 평가는 힘이 듭니다. 그래서 2020년 경 부터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수당’ 에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관련 조례를 보면 1. 복지 향상 2. 동학농민혁명 정신 선양사업으로서 수당을 지급한다고 합니다. 복지향상이 선양사업보다 앞서 위치한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또 동학농민혁명 정신은 무엇인가요? 그 수당은 동학도로서 받는건가요 아니면 농민으로서 받는건가요? 이것들을 대답하는데 실패했기에 논란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창의문을 발표할 때, 오지영에 따르면 이런 외침이 백성들 사이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이놈의 세상은 빨리 망해야 한다“, ”어느쪽이 죽던지 어서 얼른 결딴이 나야한다“
지금도 정치를 똑바로 하지 못하면 우리 후손들은 또 수당을 지급해야 할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