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년도 서브프라임으로 GM은 몇몇 공장의 가동을 기약없이 중지합니다. 노동자들은 일괄적으로 해고되었고, 제인스빌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노동유연성의 힘을 과신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효율적인 자본주의적 제도라고 주장합니다. 기업이 필요할 때 해고하고 채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사회에게도 이득이라는 것이죠. 하지만 저는 이 주장을 듣고 CPU가 떠올랐습니다.
CPU는 사실 한 번에 한 프로세스밖에 처리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컴퓨터가 멀티테스킹이 가능해 보이는 것은 작은 시간단위로 쪼게서 실행하는, 시분할 스케줄링을 하기 때문이죠. 무척 효율적입니다. 그러나 그 단위를 아주 극소화 한다고 해서 성능이 늘어나진 않습니다. 왜냐하면 프로세스 사이를 오갈 때 인터럽트가 발생하기 때문이죠.
노동유연성의 맹점도 이 인터럽트에 있습니다. 직장에서 하루의 1/3을 보내야 하는 인간의 이직은 핑거스냅처럼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실제로 노동유연성이 제공하는 효율성이란 이 인터럽트 비용을 노동자에게 전가함으로써 발생합니다.
불가피한 해고는 발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터럽트 비용이 사회를 위해 발생된 것이라면, 지불도 사회가 해야합니다. 예수를 대속시키듯 노동자에게 비용을 전가하고 파산시킴으로써 도약하는 사회는 존재해서는 안됩니다.
실업자가 무너지지 않도록 돕고 원한다면 재교육을 지원하며, 이 사이의 인터럽트가 충분히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인지해야합니다. 사실, 제인스빌에서는 이보다 더 상황이 안좋았습니다. 전체 경기가 위축되면서 다른 일자리도 사라졌으니까요. 직업재교육을 받은 후에도 취업한 사람 수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자유시장주의자들의 아메리카드림은 이렇게 반례를 보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열심히 일했고 또 재교육에 나서더라도 내일을 걱정해야 하는 현실입니다. 정부가 나서야 했습니다. 주 정부는 기업 유치를 위해 단체교섭권을 약화시키는 법을 통과시킵니다. 이는 결국 주지사 소환투표로 이어지지만, 결국 주지사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게 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주지사를 지지한거죠.
사실, 노동자들의 양보가 필요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분노를 부른 것은 그 양보가 강요되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변화는 이해당사자들의 반동을 부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주 정부는 양보를 교섭하는 대신 시원하게 양보를 받아챙깁니다.
제인스빌 이야기는 제인스빌 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08년도 당시 온 미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고, 한국에서도 GM대우가 철수하면서 군산이 같은 일을 겪습니다. 우리의 이야기일 수 있었습니다. 사회는 기업의 정체성을 명확히 해야합니다. 기업이 단순히 이윤추구자인지, 아니면 사회의 구성원으로써 책임을 가지는 영리법인인지.
이 모든 일이 끝난 후, 제인스빌은 살아남습니다. 자연인은… 많이 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