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빌리(Hillbilly)는 깡촌을 뜻한다. 특히 ‘러스트 벨트’ 라는 쇠락한 제조업 지대와 그곳의 거주민들을 뜻하는 말이다. 책의 저자인 J. D. 밴스는 여기서 자랐다. 암울하기 그지 없는 성장배경을 딛고 일어나 자수성가에 성공한 화자의 일대기는 감동스럽다. 하지만 이 책이 한국에서 유명세를 탄 이유는 저자가 `24년 대선에서 공화당 부통령후보로 출마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이상 밴스의 자서전은 오직 개인의 자서전으로만 단순히 읽힐 수는 없다. 그렇다면 화자가 읊는 엘레지(Elegy), 슬픈 노래에 귀를 기울여 보자.
화자가 제시하는 와이트 트래쉬(White trash)의 서사이다. 비교우위와 자유무역에 따른 분업은 세계화를 만나 예상 밖의 화학반응을 일으켰다. 선진국에 있던 제조업은 더 낮은 임금을 찾아 후진국으로 빠져나갔다. 물가는 낮아지고 기업의 이윤은 치솟았다. 하지만 제조업에 종사하던 중산층은 무너졌고, 그 분노는 사회의 무관심과 소외속에서 정당성을 얻었다. 밴스는 그저 그 슬픈 곡조를 하나로 조율했을 뿐이다.
저차산업이 흥하고 고차산업이 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미국 예외는 없다. 실리콘밸리에서는 혁신이 일어나고 세상의 모든 돈은 월가로 모인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희생시킨 공동체의 일원들을 잊고 말았다. 그렇게 방치당한 뒷방에는 이제 그들이 흘렸던 땀과 지금 흘리는 눈물이 흘러 습기로 가득차고 곰팡이가 피어나는 것이다. 대안우파라는 검은 곰팡이가 아니더라도, 설사 지금 곰팡이를 박멸하더라도. 문제의 원인을 해결하지 못하면 또 다시, 혹은 또 다른 곰팡이가 피어날 것이다. 뻔한 일이다.
약물과 자괴감이라는 곰팡이 슬은 힐빌리에서 화자는 연꽃처럼 일어났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은인중 단 한 명이라도 없었더라면 지금의 자신은 없었을 거라며 이 행운에 대해 겸손을 잃지 않는다. 그렇다면 화자는 힐빌리의 마약중독자들과 복지여왕(Welfare queen, 복지제도를 악용하는 사람)의 불운을 비난할 수 있을까? 물론 사람의 삶이라는 것은 자신의 선택만으로 사는 것도 아니고 외부의 환경만으로 사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선택의 댓가를 엄히 물게 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공평한 환경을 제시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형사재판에서 양형요소를 제시하는 이유이다.
혹자는 화자을 혹평하며 아직도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난한다. 나는 이런 견해에 반대한다 모두에게 트라우마가 있으며 이는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용을 마약중독자와 복지여왕에게도 보이고싶다. 이들이 다시 일어날 때 까지. 유능한 변호사와 훌륭한 밴처사업가가 진흙탕에 박혀있는 사회는 모두에게 비참한 사회다. 하지만 지금 화자의 정치적 행보는 이들에게 기회를 주자는 건지, 아니면 불운에 댓가를 청구하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교육과 기회는 공평한 승부를 위한 최소한의 매너다.
J. D. 밴스가 부르는 노래가 올챙이 시절을 잊어버린 개구리의 울음에 그쳐서는 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