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1. 14.

신영증권 복기

 

결론부터 말하면 괜찮은 매매였음.


내가 가장 의심한 부분은 폭락일 나타난 급격한 변동성이었음.

팻핑거로 추정되는데, 그건 추정이고 확실한건 변동성을 보니 호가가 너무 얕아서 과매도가 나타났을 거라는 생각이었음.

그래서 평단가 131,500에 탑승. 얼마 안있다가 평가수익 백만원도 찍히고 하루 이틀에 먹는 것 치고는 나쁘지 않았음.

다만, 낙폭을 생각하면 최소 14만원은 갈 수 있는 상황이기에 팔지 않았고, 좆같은 시간이 시작됨.

순식간에 +백만에서 -오십만으로 바뀌니까 오만생각이 다 들기 시작함. 이때 상법개정안 연기 우려도 낙폭에 반영되었다는 것도 알게 됨.

손절할 위험이 있었는데, '내가 지금 절망해서 손절하려 한다. 확신에 손절해야 한다.' 는 메타인지 굴림 대성공이 뜨면서 참음.

결국 오늘 상법개정안 조속히 처리하겠다는 뉴스가 뜨면서 낙폭을 전부 회복함.원래는 폭락 전 기존 추세인 144,000에 팔려고 했는데

푼돈에 매도타이밍을 놓치면 안된다 싶어서 14만에 털음. 결과적으로는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은 선택이 됨.

매도시에 재미있는 현상이 있었는데, 14만원에 거의 천주 가까운 매도벽이 있었던 것. 시장참여자들도 적정가격을 몰랐음. 그냥 14만원이 이뻐서 걸어놓은거임.

이걸 보고 조금 더 갈 수 있겠다는 싶었지만, 그 뒤를 내가 어떻게 알겠음? 시장참여자들이 확신하지 못하는걸 보면 언제 폭락할지도 모름.

아마 상법개정안은 통과될지도 모르고 신영증권도 자사주를 소각할지도 모름. 하지만 이 이상의 불확실성을 내가 인수할 생각은 없음.

2025. 8. 17.

빚의 대관식

대한민국에 대관식이 있었다.

예로부터 군주들은 부족한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대관식을 활용하기도 했고, 이를 위해 있는 세간살림을 털어넣기는 물론이고 빚을 지기까지도 했다. 하여간 동서와 고금은 서로 통하는 면이 있기 마련이다.

모든 정권이 가장 강한 추진력을 가진 첫 해년도에, 이번 정권은 빚을 상환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모두 권좌에 앉기 위해 과도하게 짊어졌던 빚이다.

이제 상환의 시간이다. 그동안 입법부에 있을 때에는 그토록 비판했던 대규모 사면을 스스로 행하는 처지가 되었다. 심지어는 일방적으로 정치적인 사면임을 너머서 그 적정성까지 의심받고 있다.

지나치게 많은 빚을 진 까닭에 도덕적 파산이냐 정치적 부도냐 말고는 선택할 길이 없게되었다. 이번 결과로 당장의 정치적 부도는 면했지만, 모든 부채를 면할 수는 없다. 도덕적 파산 역시 면하지 못했다.

자신이 지니고 있던 그 모든 자산이 자본이 아닌 부채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데 얼마나 걸릴까? 제명에 달렸다. 기한의 이익을 누리는 중에는 꿈에도 모르겠지만.

사실 기한 이익은 특약에 의해 쉽게 상실될 수 있는 종류의 권리이다. 채권자들은 정치적 부도상황을 감지하면 언제든지 실력행사에 나설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빚의 승리이자 빚의 대관식이다. 

2025. 7. 15.

항산과 청렴

맹자는 현실적인 유학자였습니다. 그로 인해 공자보다는 맹자의 글을 읽을 때 조금 더 씹는 맛을 남깁니다. 사실 이는 맹자가 절문의 화를 당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주원장은 “신하가 할 수 없는 말을 하였다“ 며 맹자의 내용을 검열하여 그 판본으로만 과거를 보기도 하였으니, 인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 말씀을 싫어했습니다.

맹자는 현실의 관점에서 항산(흔들리지 않는 재산)이 있어야 항심(흔들이지 않는 마음)도 있다고 했으니, 아래와 같습니다: 
고정적인 생업이 없으면서 항심(恒心)을 지니는 것은 오직 선비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일반 백성의 경우는 고정적인 생업이 없으면 그로 인해 항심도 없어집니다. 만일 항심이 없다면 방탕하고 편벽되고 간사하고 사치스러운 행위를 하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백성들이 죄에 빠지는 데 이른 이후에 그것을 좇아서 형벌에 처한다면, 그것은 백성들을 그물질해 잡는 것입니다. 어떻게 어진 사람이 임금의 지위에 있으면서 백성들을 그물질해 잡는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밝은 왕은 백성들의 생업을 제정해 주되 반드시 위로는 부모를 섬기기에 충분하게 하고 아래로는 처자를 먹여 살릴 만하게 하여, 풍년에는 언제나 배부르고 흉년에도 죽음을 면하게 합니다. 그렇게 한 후에 백성들을 몰아서 선한 데로 가게 하므로 백성들이 따르기가 쉽게 됩니다.
지금은 백성들의 생업을 제정해 주되 위로는 부모를 섬기기에 부족하고 아래로는 처자를 먹여 살리기에 부족하여, 풍년에는 내내 고생하고 흉년에는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래 가지고서는 죽음에서 자신을 건져 낼 여유조차 없는데 어느 겨를에 예의를 익히겠습니까? 왕께서 만일 어진 정치를 시행하려고 하신다면 어째서 근본으로 돌아가지 않으십니까?
오 무(畝) 넓이의 집 둘레에 뽕나무를 심으면 오십 세 된 노인이 비단옷을 입을 수 있고, 닭과 돼지와 개 등의 가축을 기름에 있어서 적절한 시기들을 놓치지 않으면 칠십 세 된 노인이 고기를 먹을 수 있습니다. 백 무 넓이의 밭을 농사짓는 데에 일손 바쁠 때를 빼앗지 않으면 여러 식구의 가족이 굶주리지 않을 수 있을 것이며, 상(庠)과 서(序)에서의 교육을 엄격하게 시행해 효도와 공경의 의미를 거듭해서 가르치면 머리가 희끗한 사람이 길에서 짐을 지거나 이고 다니지 않게 될 것입니다. 칠십 세 된 노인이 비단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일반 백성들이 굶주리거나 헐벗지 않게 하고도 통일된 천하의 왕이 되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은 구태여 맹자왈에서 찾을 필요 없이, 옛 성현들은 ‘곳간에서 인심난다’, ‘열흘 굶고 담 안 넘는 사람 없다’와 같은 속담으로도 인식하고 있습니다.

역사상으로도 아테네에서는 공무수행자에게 수당을 지급했고, 18세기 즈음부터는 영국과 프랑스, 미국에서 공직자에게 정기적 월급을 주었으니, 이는 일반인의 참여와 항산을 보장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한편, 조선시대의 이방에게는 고려시대까지 지급되던 녹봉이 중단되었습니다. 오히려 여러 부담만 발생하게 되었고, 이는 조선 특유의 과세제도와 맞물려 이방의 부패를 부추겼습니다.

비록 오늘날의 공무원들은 삶을 유지할 수 있는 봉급을 받지만, “돈 벌려면 기업으로 가라“는 태도는 청렴은 커녕 사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공직자들의 희생과 소명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맹자는 이런 말도 남겼습니다:
하늘이 내리는 재앙은 그래도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가 불러 들인 재앙으로부터는 살아날 수가 없다.

입은 화의 근원이고 혀는 제 몸을 자르는 칼이라고 하니, 이는 곧 스스로 불러들이는 재앙입니다.

2025. 7. 12.

스마트펙토리라는 말장난

사기꾼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에 집착합니다. 그래야 그 검은 속내를 숨길 수 있습니다.

스마트팩토리가 그렇습니다. 공장이 뭐 얼마나 똑똑한걸까요?

이럴때에는 반대로 질문합시다. 그럼 어떤 공장에는 스마트팩토리를 적용하면 안되나요?

만약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면 그것은 무의미한 단어입니다. 구태여 새로운 고유명사를 창조할 필요 없이 모든 공장이 스마트해지면 됩니다.

우리는 맞춤법 검사기를 더이상 인공지능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냥 쓰고 있죠. 기술은 이렇게 우리의 삶 속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스마트팩토리가 아니라면, 그동안 아무런 발전이 없었음을 자인함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는 아직도 스마트팩토리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똑똑한 공장이 갖추어야 할 최소 조건은 알고 있습니다.

바로 자원(혹은 정보)의 무결성과 가용성을 지키는 것입니다.

원료를 구입하고 적절한 버퍼를 유지하며 가공하고 보관 후에 출하하고 폐기물 처리에 이르기까지 모든 노드에서 말입니다.

여기서 실패하면 프로그래밍에서 말하는 뎅글링 포인터와 같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더 위험한 점은 현실에선 경고를 띄우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큰 조직일 수록 부서간 격벽, 정보의 단절, 책임의 분산 등으로 인해 이를 지키기 어렵고 심지어는 자신이 무엇을 위해 일하는지도 모를 수도 있습니다.

ERP는 오히려 이런 증상을 고착시키는 형태로 설계되곤 합니다. 전사적 자원을 아무런 고민 없이 관리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자원뿐 아니라 한 공장 내에서 다른 부서가 원하는 자원을 알지 못하면 무의미한 생산만이 반복됩니다.

자원의 무결성과 가용성은 첨단 기술만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민 기술의 발전으로 더 쉬워졌을 뿐, 경영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제인스빌 이야기를 읽고

08년도 서브프라임으로 GM은 몇몇 공장의 가동을 기약없이 중지합니다. 노동자들은 일괄적으로 해고되었고, 제인스빌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노동유연성의 힘을 과신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효율적인 자본주의적 제도라고 주장합니다. 기업이 필요할 때 해고하고 채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사회에게도 이득이라는 것이죠. 하지만 저는 이 주장을 듣고 CPU가 떠올랐습니다.

CPU는 사실 한 번에 한 프로세스밖에 처리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컴퓨터가 멀티테스킹이 가능해 보이는 것은 작은 시간단위로 쪼게서 실행하는, 시분할 스케줄링을 하기 때문이죠. 무척 효율적입니다. 그러나 그 단위를 아주 극소화 한다고 해서 성능이 늘어나진 않습니다. 왜냐하면 프로세스 사이를 오갈 때 인터럽트가 발생하기 때문이죠.

노동유연성의 맹점도 이 인터럽트에 있습니다. 직장에서 하루의 1/3을 보내야 하는 인간의 이직은 핑거스냅처럼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실제로 노동유연성이 제공하는 효율성이란 이 인터럽트 비용을 노동자에게 전가함으로써 발생합니다.

불가피한 해고는 발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터럽트 비용이 사회를 위해 발생된 것이라면, 지불도 사회가 해야합니다. 예수를 대속시키듯 노동자에게 비용을 전가하고 파산시킴으로써 도약하는 사회는 존재해서는 안됩니다.

실업자가 무너지지 않도록 돕고 원한다면 재교육을 지원하며, 이 사이의 인터럽트가 충분히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인지해야합니다. 사실, 제인스빌에서는 이보다 더 상황이 안좋았습니다. 전체 경기가 위축되면서 다른 일자리도 사라졌으니까요. 직업재교육을 받은 후에도 취업한 사람 수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자유시장주의자들의 아메리카드림은 이렇게 반례를 보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열심히 일했고 또 재교육에 나서더라도 내일을 걱정해야 하는 현실입니다. 정부가 나서야 했습니다. 주 정부는 기업 유치를 위해 단체교섭권을 약화시키는 법을 통과시킵니다. 이는 결국 주지사 소환투표로 이어지지만, 결국 주지사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게 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주지사를 지지한거죠.

사실, 노동자들의 양보가 필요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분노를 부른 것은 그 양보가 강요되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변화는 이해당사자들의 반동을 부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주 정부는 양보를 교섭하는 대신 시원하게 양보를 받아챙깁니다.

제인스빌 이야기는 제인스빌 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08년도 당시 온 미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고, 한국에서도 GM대우가 철수하면서 군산이 같은 일을 겪습니다. 우리의 이야기일 수 있었습니다. 사회는 기업의 정체성을 명확히 해야합니다. 기업이 단순히 이윤추구자인지, 아니면 사회의 구성원으로써 책임을 가지는 영리법인인지.

이 모든 일이 끝난 후, 제인스빌은 살아남습니다. 자연인은… 많이 죽었습니다.

분노세대를 읽고

이 르포타주는 게임스톱 사태의 한 가운데 있던 월스트리트벳츠라는 서브레딧의 흐름을 다룹니다.

원제는 더 트롤 오브 월스트리트입니다. 월가에는 늑대도 살고 트롤도 사는데 사람은 안 사는 모양입니다.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재미있고 걸림없이 술술 흘러가는데, 눈에 밟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인셀타령이에요.

‘여러 세대에 걸쳐 인간 사회에서 먹이사슬의 최상위를 차지했던 젊은 남성들이 언제부터인가 측정 가능한 거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젊은 여성들에게 뒤쳐지거 있다는 증거가 사회 곳곳에서 나타났다’

로 월스트리트벳츠의 탄생근거를 제시하는 부분은 르포타주로서는 주제에 맞지도 않으며, 학술적으로는 담론이 미약합니다.

특히 제이미 라는 사람의 알콜중독 원인을 ‘혈기 왕성한 젊은 남성의 몸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충동을 어떻게든 잠재우려 노력하는 과정’ 으로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적대감이 느껴질 지경입니다.

제이미는 글 초반에서 밝히듯 매너리즘한 업무와 회색빛 일상을 단조롭게 오가고 있었어요. 추후 알중치료소에서도 ‘구체적인 트라우마나 촉매를 찾을 수 없었‘ 다고 작가가 말하고 있고, 제이미는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맥시코시티로 떠나며 알콜 이야기는 사라집니다. 알콜중독은 멎어가던 삶을 유지하기 위한 몸의 항상성일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어쩌면 이 사례, 그러니까 공백에 찾아온 알콜과 같은 메커니즘은 월스트리트벳츠와 게임스톱 사태를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쥐 공원 실험과 마찬가지로요.

그것을 위해서는 책에서 전반적으로 제시되는 월가와 헤지펀드에 대한 적대감을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작가가 작중에 언급했듯 “월가에 대한 불신이 지금처럼 높았던 적이 없었습니다.”

2008년도에 20세기가 막을 내리면서, 좁게는 미국인 넓게는 전세계인의 삶에 비가역적인 상처가 남았습니다. 원인을 제공한 월가는 Too big too fail을 내세워 살아남았고, 사회는 너무 작아서 실패해도 되는 사람들을 희생시켰습니다.

그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처럼 집에서 내밀렸습니다. 챙긴거라곤 체계에 대한 불신과 배신감 뿐이겠죠. 공교롭게도 오늘날 인디언들은 ‘보호구역’ 에서 살아갑니다. 그들에게 알콜중독이 많은 이유는 그저 그네들 특유의 ’끓어오르는 충동‘ 뿐이겠죠.

이렇게 붕괴된 중산층의 삶은 공백이 되었습니다. 반지성주의, 트럼프의 약진, 대안우파와 음모론자들의 서식처입니다. 월스트리트벳츠는 그저 발현된 어느 지점이었을 뿐이죠. 아마 폐쇄시켰어도 게임스톱사태는 유사하게 일어났을겁니다.

공백이 된 페트리 위에 곰팡이는 피어났고, 촉매가 된 것은 게임스톱에 대한 헤지펀드의 공매도였습니다. 매우 반응성이 좋은 촉매였지요. 게임스탑은 어린시절의 좋은 감성을, 헤지펀드의공매도는 그걸 날려버린 나쁜 기억을 떠올렸으니까요.

결과적으로 월스트리트벳츠는 헤지펀드 여럿을 파산시킵니다. 그중 하나가 이를 시장교란행위로 SEC에 고발하면서 책에서는 이 이슈를 마무리짓습니다.

하지만 되묻고 싶습니다. 왜 이게 시장교란행위인가요? 월스트리트벳츠의 행동이 다수의 행동이기에 부당하다면, 헤지펀드의 행동은 소수의 행동이기에 정당한가요? 이러한 불공정이야 말로 사회의 균형을 지키기 위해 악덕을 불러왔던 원흉입니다.

로빈후드는 그러한 악덕에서 큰 돈의 냄새를 맡습니다. 증권이라는 개념을 마권수준으로 끌어내리고, 역사상 전례가 없는 방식으로 매수버튼을 뽑아버리면서 개미들에게 추크츠방을 강요했습니다.

서브프라임으로 돌아가서, 그러니까 아무에게나 대출을 해주고자 하는 금융기관의 탐욕은 불가피하다고 하더라도 그 사후처리가 공정했더라면 지금 이 세대는 분노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월스트리트는 트롤로 가득차있고, 메인스트리트는 여전히 비어있습니다.

동학사로 본 동학농민혁명수당

오지영이 쓴 동학사는 역사소설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사실과 다르거나 곡해한 부분이 많습니다. 본인부터가 천도교인이므로 이해당사자가 쓰는 역사란 변질될 우려가 크죠.

하지만 다르게 보면 이 책은 동학의 밑바닥을 보여주진 않겠지만, 동학의 천장 즉 아무리 미화해도 감출 수가 없었던 부분에 대해서는 알 수 있습니다.

가령 동학은 철저하게 종교적이었습니다. 오지영은 신비주의를 배격하고자 하는 입장이었다지만, 최제우가 태어나면서 구미산이 크게 울었다거나 칼로 내려쳐도 목이 베이지 않았다는 서술이 이를 보여줍니다.

특히 동학은 유교도 불교도 선교도 서학도 아니다. 라고 말하지만, “부유한 사람과 귀한 사람과 글 잘하는 사람은 도를 통하기 어렵다” 거나 “선생의 밥을 푸고도 남은 밥이 있어 10여인의 식구가 모두 먹었다” 는 구절은 성경을 떠올리게 합니다.

동학은 서학에만 의지하지도 않았는데, 창의문과 홍계훈에게 쓴 편지를 보면 전봉준은 스스로를 호남유생이라 칭했고 유교적 세계관에 입각하는 등 근왕주의적 농민반란, 즉 나랏님은 죄가 없는데 방해하는 사악한 무리를 처단하자는 논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오농민전쟁이 2020년 경까지 긍정적인 이미지로 남아있던 이유는 철저하게 동학과 농민들의 생각이 달랐고, 이로인해 동학의 문제점들이 잘 감추어졌기 때문입니다.

시발점이 된 전주, 익산, 고부의 민란은 지역적 불법수탈에 반발하여 발생한 민란입니다. 만약 동학이 없었어도 발생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충분히 타락했고 때마침 거기에 전봉준이 있었습니다.

실제로도 첫 민란 당시에는 동학의 전면적 내전이 아니었습니다. 불을 지른건 무능한 안핵사였죠. 이때부터 동학이 전면적으로 농민군의 수뇌부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농민들과 동학의 괴리된 목표는 해소할 수 없었습니다.

농민들은 그저 먹고살길 바랬습니다. 한울님이나 인시천 사상은 알빠 아니겠죠. 확신도 없었습니다. 아마 피의 일요일 당시의 러시아백성들과 같은 생각이었을겁니다.

나라가 어찌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동학도들의 것이죠. 신화적 존재인 전봉준이 부상을 입고 기세가 기울자 농민군은 엄청난 속도로 탈주합니다.

결국 우금치 고개에서 갑오농민전쟁은 막을 내립니다. 관군과 일제에 의해 수많은 조선인이 목숨을 잃은 비극이었습니다. 하지만 비극이 권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동학운동과 농민운동이 이토록 혼재되어있기에 평가는 힘이 듭니다. 그래서 2020년 경 부터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수당’ 에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관련 조례를 보면 1. 복지 향상 2. 동학농민혁명 정신 선양사업으로서 수당을 지급한다고 합니다. 복지향상이 선양사업보다 앞서 위치한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또 동학농민혁명 정신은 무엇인가요? 그 수당은 동학도로서 받는건가요 아니면 농민으로서 받는건가요? 이것들을 대답하는데 실패했기에 논란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창의문을 발표할 때, 오지영에 따르면 이런 외침이 백성들 사이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이놈의 세상은 빨리 망해야 한다“, ”어느쪽이 죽던지 어서 얼른 결딴이 나야한다“

지금도 정치를 똑바로 하지 못하면 우리 후손들은 또 수당을 지급해야 할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