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2. 15.

내일로 -2일차 목포

사실 목포는 올 필요가 없던 도시였다.

이름난 볼거리도 없고 외지기까지해서 일정이 내 얼굴처럼 어그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벽 5시에 일어나 목포행 열차에 오른 이유는 자명하다.

부산을 가는데 목포를 안 가면 이상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까 이유가 자명하다고 했던가? 미안하다, 바보같다.

사실 천천히 점심쯤 열차를 타려고 했는데, 내가 너무 빨리 일어나서 그냥 새벽열차를 타버렸다.

몇 정거장을 지나치자, 기차의 왼편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고개를 좌로 돌리면 아침이고 우로 돌리면 새벽인, 기묘한 경험이었다.


목포역에는 인근 미술가&학생들의 유화전시가 한창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아름다움은 사진기와 녹음기로는 담을 수 없는 것이다.

조식은 굳이 언급하지 않겠는데, 앞으로도 끼니에대한 언급조차 없으면 매우 실망스러웠다는 뜻이다.

역에서 바로 내려와 언덕을 오르면 유달산의 초입, 노적봉이다.


여기만해도 목포시내와 다도해가 내려다보였다.

하지만 아직 크롬방제과에서 바게트가 나오는 시간이 되지 않아 정상으로 향했다.

관운각에 이르자 슬슬 뒤를 바라보는 것이 무서워졌다. 바위산은 항상 이렇다.

여기까지 즐기고 하산을 했더라면 좋았을텐데, 아직도 시간이 덜됬다.

기여코 나는 고소공포증을 안고 정상, 일등바위로 향했다.


참고로, 이 사진이 정상으로 가는 길 마지막 사진이다. 더 높은 곳에선 무서워서 못찍었다.

그래도 용케 유달산 정상의 표지석을 볼 수 '는' 있었다.

하지만 그 표지석 주변의 공간은 체감상 대략 2m² 밖에 안되고 그 밑은 낭떠러지였다.

입에서는 욕이 절로 나왔다. 나는 사진을 찍을 여유도 없이 호다닥 내려오는 수 밖에 없었다.

정상의 가장 높은 바위에 올라가기 전에 있는 표지석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유달산은 영혼들이 심판받으러 오는 곳이기도 하다.'

내가 확언하건데, 여기까지 심판받으러 올 영혼이면 구원은 이미 그른 것 같다.

슬슬 크롬방제과가 바게트를 내놓을 시간(10:40)이 얼추 되어 발걸음을 돌렸다.

내려오는 길에 그림이 이뻐서 찍어봤다.


크롬방제과는 친구의 강권으로 알게되고, 또 들르게 된 곳이다.

대략 10:30분부터 매대에는 바게트를 사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나는 새우바게트(₩4,500) 하나를 사들고 2층의 카페테리아로 향했다.


내꺼보다는 조금 작은 사이즈였는데, 칼집이 들어가 있었고 사이에는 머스터드가 발라져있었다.

갓나온 빵을 먹는다는건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었고, 외지에서라고 예외는 없었다.

꽤 직관적인 설명을 하자면, 새우깡의 향기가 났다. 욕한게 아니다. 맛있었다.

줄이 매대에서 입구까지 나래비를 서 있었는데, 이 줄이 짧아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크림치즈도 사보고 싶었지만, 입이 짧아 그러진 못했다.

나는 그곳에서 크림빵(₩2,500)을 사들고 여객선터미널쪽으로 향했다.


크림이 지저분한 것은 내 불찰이다.

크림빵에는 키위와 오랜지가 올려져있었는데, 깊은 곳에는 망고같은 것도 들어있었다.

생크림의 맛도 근래에 먹은 것중에 가장 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처 카페에서 산 아메리카노와 마시니 생크림이 사르르 녹아들어 즐거웠다.

크림빵을 다 먹을때즈음, 나는 수산시장에 도착했다.

항구도시 아니랄까봐 서산과 비교할 수 도 없이 큰 수산시장이었다.

여기 저기서 홍어를 팔고 있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이 사진이다.


서로 마주 보고 홍어를 써는 모습이 나에게는 노다메 칸타빌레의 경연같이 보였다.

이어서 발길이 향한 곳은 김대중 노벨상 기념관이었다.

역시 별다른 목적이 있어서 간 곳은 아니다, 그냥 가다보니까 보여서 가봤다.

다만, 해매는 과정에서 기억에 남는 일이 있었다.

난영공원에서 길을 잃고 산책을 하던 아주머니에게 길을 여쭈었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내 여행중 본 가장 밝은 표정을 지으며 대답해주셨다.

"바로 저 아래 보이는 건물이에요, 가서 좋은 구경 많이 하고 오세요."

존댓말까지 써주시며 안내를 해주셔서 무척 고마웠다.

김대중이라는 인물의 가타부타을 떠나서, 목포의 기둥이었던 김대중의 발자취를 본 것 같았다.

미리 이야기 하건데, 나는 구미를 방문할 예정이다.

예측하는 이유가 있다면, 맞다. 박정희의 도시가 내뿜는 기묘함을 보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어떤 아주머니가 같은 미소를 지으며 길을 알려준다면,

나는 박정희를 비웃을 수는 있어도, 그 아주머니를 비웃을 수는 없을 것 같다.

미스 프레지던트라는 영화를 보고 시작된 물음은 이제 나에게 답을 재촉하고 있다.


기념관에서도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이미 들어서기 전부터 가장 깊은 내용을 보았으니까.

기념관을 빠져나온 나는 시간이 겨우 12:30분밖에 되지 않았다는걸 알았다.

이미 목포에서 볼 만 한 건 다 본 것 같아서, 여섯시에 출발하는 KTX를 탈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추가비용을 감수하더라도, 결국 전라도에서 3일을 묵어야 하는건 똑같기때문에 포기했다.

대신 지도를 보니 북항이라는 곳이 보였다. 그래서 거기까지 걸어가기로 결정했다.

정확히 두 시간 걸렸다.

직선으로만 가도 되는데, 나는 한번 본 길을 또 가는걸 싫어한다.

그래서 목포시청을 찍고 갔다. 지금 보니 직선거리로는 5.2km 나왔다.

솔직히 말하자면 북항도 시내도 딱히 볼 건 없었다.

중간에 시장 하나를 관통했는데, 거기서도 홍어를 판다는 점 말고는 말이다.

보름만 더 있으면 25이라고 늙었는지, 도저히 지쳐서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숙소를 결국 또 일찍 잡기로 결정하고 목포역으로 다시 걸어왔다.


내가 고른 숙소는 목포역 인근의 노르웨이 게스트 하우스였다.

앞서 어제 점심을 고른걸 보면 알겠지만, 여기도 싸서 선택했다.

내 인생 첫 게스트하우스인데, 무난한 가격에 무난한 시설인 것 같다.

여기어때에 달린 평에는 춥다는 말이 있었는데, 확실히 공기가 냉하긴 하다.

건물 자체가 오래되서 생긴 외풍같았다. 별 수 없지.

한 시간 반 가량을 쉰 5시 40분, 나는 저녁을 먹기 위해 길을 나섰다.

한결 공기는 차가워졌고 15분을 넘게 걸어야 했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었다.

내가 선택한 저녁식사 장소는 동북음식점이었다.

여러 백반집을 확인했지만, 여기가 가깝고 저렴하고(₩8,000) 혼밥이 가능했다.

사실 여러 이유를 제치고 홍어회가 몇점 나온다는 점이 가장 중요했다.


결과를 말하자면, 이번 여행 들어(이틀밖에 안 됬지만) 가장 성공적인 식사였다.

인터넷과 귀동냥으로 전라도 밥상이 캐쩐다는 사실은 익히 들었지만 이정도 일줄은 몰랐다.

반찬의 가짓수만 많은게 아니라, 그 질이 모두 빠지는 곳이 없었다.

나는 결국 살다 살다 처음으로 공깃밥을 추가했다. 너무 만족스러웠다.


아 그리고 좀 있다가 생선 한 마리가 뒤늦게 구워져나왔다.


내일 아침은 팥칼국수를 먹으려 했지만, 기차시간과 오픈시간이 잘 안맞아서 포기했다.

대신 게스트 하우스에서 제공하는 조식으로 간단하게 때우기로 했다.

목포여행은 너무 만족스러웠기 때문에, 추후에 다른 내일러들을 위해 일정을 정리할 예정이다.
Sh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