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2. 14.

내일로 -1일차, 담양

생각보다 빠르게 짐을 풀었다.

이게 다 내 아이폰의 베터리가 잡스의 영혼과 함께 사라진 탓이다.

미리 지도를 봐둔 덕분에 별다른 뻘짓 없이 모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첫날부터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많았다.

예정한 기차가 광주역이 아닌 광주'송정’ 역으로 간다는 사실을 안 건 장항선의 끝자락에서였다,

정작 그 기차도 내일로로 탈 수 없는 KTX였다는 사실을 안 것도 역시 장항선의 끝자락에서였다.

씨팔.


결국 예상보다 한 시간 느리게 광주에 도착했고, 담양에 도착한 것도 한 시간 넘게 늦은 한 시였다.

담양에 기대한 볼거리는 크게 두 가지였다. 죽녹원과 메타세콰이어.

죽녹원으로 가는 버스에 오르자, 볼거리는 한 가지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타세콰이어의 풍성했던 잎사귀는 연말 폭탄세일이라도 맞은 것처럼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 사실 나는 죽녹원을 보기 위해 담양에 왔다.



올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었다.

댓잎이 서로 부딪히며 사르르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이들에게도 들려주고 싶어 녹음을 해봤지만, 결과물은 썩 감동적이진 않았다.

녹음기도 사진기도, 결국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사실 편안하게 대나무를 감상할 수 있는 여건은 안됬다.

날씨는 추웠고, 경사는 제법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천원씩이나 내고 갈만큼 아름다웠다.

담양을 먹여살리는건 두 종류의 나무라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죽녹원에는 봉황루라는 전망대가 있는데, 그 1층에는 카페도 있었다.

아무리 관광지라지만 아메리카노 3.5는 좀 심한 것 같았다.

각설하고 2층에 올라가면 담양시내가 넓데데하게 내려다 보였다.


이름 모를 강가에 반사된 햇볕이 아름다웠는데, 차가운 바람은 내 취향이 아니어서 뒤돌아섰다.

죽녹원에 마련된 여러 산책로중에, 나는 선비의 길을 택했다.

다른 의미는 없었고, 그 편이 죽녹원을 삥 둘러 관광하는데 좋았기 때문이다.

극한의 이득충 루트인 셈이다.




선비의 길은 죽녹원의 가장자리를 훝는 길이어서 대나무 사이로 바깥 세상이 보였다.

하지만 나는 전혀 다른 이면세계에 있는 것 같았다.

바깥 세상의 형상이 보이고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고요한 이곳에서 홀로 숨을 쉬는 것만 같았다.

실은 커플이 많아서 홀로 숨을 쉬는 것은 나뿐이었다.

씨팔.


선비의 길을 따라 쭉 돌아간 죽녹원의 후문에는 전설의 연못, 승당수가 있었다.


앞의 푯말에는 1박 2일 촬영지임을 알리는 동시에, ‘이승기 연못’이라는 이명도 소개하고 있었다.

가지 않은 길을 따라 걷고 있으려니, 사유지라는 푯말이 보였다.

나중에 확인한 거지만 그 사유지에는 누군가의 묘지 몇 기가 있었다.

자세한 정황은 모르지만, 분묘기지권이란 땅주인에게는 참으로 두려운 것이다.

이때부터 나는 허기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땅만 보고 걸었던 것 같다.

원래는 국수가 유명하다길래 먹으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좀 더 든든하게 먹어야했다.

때마침 죽녹원 앞에 죽통밥 정식을 파는 식당이 여럿 있었다.

관광지에서 지갑 여는 사람만큼 호구가 없지만, 나는 이미 블랙카우라 상관하지 않았다.

내가 고른 음식점은 가장 싼 가격인 죽녹원 첫집 이었다.




할말하않.

저녁을 싼걸로 먹어야겠다.

아무튼 만원이었으니까 손해는 아니리라는 마음을 먹고 광주로 돌아왔다.

앞서 말한 것 처럼 원시적인 방법으로 예약한 모텔을 찾아왔는데, 꽤 놀라운 곳이다.

우선… 티비를 키자마자 등장한 화면이 나에게는 세삼스러운 충격이었다.

왠 금발의 미녀가 탐스럽게 빅팜을 빠는 장면이었다.

아마 전에 이 방을 썼던사람의 취향이었나보다.

두 번째로는 방에 있던 자판기였는데, 파는 품목중 몇가지가 눈에 띄었다.

진동 에그나 진동 링을 팔고 있었다. 거북굿샷은 내가 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여긴 대실 전문인가보다.

아니면 ‘여기어때’라는 어플이 나같은 아싸가 쓸 어플이 아니었던지...

아쉽게도 주변에 마땅한 갈 거리가 없었다.

대인야시장은 내일 밤에 열고 양동시장은 내일 아침에 갈 꺼니까.

오늘 밤은 영화 틀어놓고 가져온 책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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