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9. 11.

끝 없는 보리밭을 걷고 있었다. 꺼끄러기의 감촉이 손에서 맴돌았다. 안개꽃처럼 별빛이 반짝일 때 나는, 아름다움에 넋을 놓고 보리를 헤쳐나가고 있다. 끝 없는 보리밭, 선선한 바람이 불 때마다 지평선까지 파도가 일 듯 보리가 흔들렸다. 그 보리의 파도에도 흔들리지 않는, 지평선 근처의 물체가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다가갈때마다 그 흐릿한 모습은 점차 퍼즐을 맞추듯 선명해져 나는 그것을 나무라고 부를 수 있었다.

그리고 소녀를 보았다. 감람나무에 기대어 앉아 있는, 흰 원피스를 입은 소녀. 보리를 스르륵 해치며 다가가는 소리가 들렸을까? 그녀는 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맑은 두 눈이 나를 비추었고, 이내 그 두 눈이 감기듯 작아졌다. 나는 그녀가 미소짓는다는 것을 알았다.

“다른 사람이 여기에 있을 줄은 몰랐는걸?”

그녀는 땅을 박차듯 자리에서 일어나 내 두 손목을 잡았다. 단발머리가 살짝 찰랑거렸다. 내가 당황 섞인 안녕을 전하자, 그녀는 기쁜표정을 숨기지 못 했다.

“안녕! 이렇게 사람하고 대화해 본 적은 정말 오랜만이야. 여긴 정말 지루했거든.”

그 밝은 표정과 내 손목을 감싼 그녀의 손에서 따스한 기운이 느껴졌다. 마치 커튼 사이로 비추는 이른 아침의 햇볕처럼.


내 손목에 와닫는 감촉이 사람의 손길에서 폴리에스테르의 감촉으로 바뀌었을 때, 나는 그 아름다웠던 보리밭과 소녀가 꿈이란 걸 깨달았다.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 아무리 기억하려고 해도, 일어나 한 잔 물을 마시고나면 사라져버리는, 꿈. 어스름이 내리고 밤이 찾아오면 또 다른 꿈으로 대체될 매일 같은, 꿈.

하지만 평소처럼 그 광경이 머릿속에서 가시지 않았다. 등굣길 버스 안에서도, 수업 중에도, 해가 다 져가는 중에서도 그 광경이 머릿속에서 가시지 않았다. 정말 그 따스함이 햇살에 불과했을까? 그 아름다운 보리밭과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을까? 나는 침대에서 오지 않는 잠을 바라며 누워있었다. 살며시 빨래집게로 잡아둔 커튼은 다시는 열리지 않을 것처럼 미동도 없었다.


끝 없는 보리밭, 나는 이것이 꿈이란 것을 알고 있다. 어제와 같은 그 장소였다. 그리고 어제와 같은 그 나무, 어제와 같은 그 소녀. 그리고 어제와 같은 그 환영.

“안녕, 또 왔네?”

“이틀 연속으로 같은 꿈을 꾸긴 처음이야.”

“이건 네 꿈이 아니야, 내 꿈이지.”

갑작스레 위화감이 날 흔들어놓았다. 그녀가 마치 내 꿈의 등장인물이 아닌, 동등한 한 명의 인격체인 양 하는 발언에 나는 꿈에서 깨버릴 것만 같은 혼란에 빠졌다. 진짜로 깨버릴 무렵,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보리밭을 가리켰다.

“이 보리밭들은 내가 만든 거야. 이 등 뒤의 나무도.”

나무의 감촉은 진짜 나무와 같았다. 그 감촉은 나에게 이곳이 현실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럼, 내 꿈이 아니라고?”

“맞아, 넌 방문객이야.”

하고는 크게 웃어 보였다. 그 웃음소리가 귀에 자꾸 울리었다.

“네 이름은 뭐야?”

그녀는 웃다가 문뜩 슬픈 일을 떠올린 것처럼 표정이 굳어버리더니, 이내 한숨을 쉬어냈다.

“그게 문제야.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어.”

한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꼬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에는 그저 드넓은 벌판과 검기만 한 밤하늘뿐이었어. 나는 이게 내 꿈이라 짐작만 했어. 대체 내가 누구인지 또 여긴 정확히 어디인진 모르겠어.”

한숨 쉬는 소리.

“배가 고프진 않았어. 목이 마르지도. 하지만 너무 외롭고 지루했어. 그래서 내가 이 꿈을 바꿀 수 있다는 걸 안 순간, 난 처음으로 이 나무를 만들어냈어.”

그녀는 편안한 표정으로 다시 한 번 나무를 어루만졌다.

“그 뒤론 쉬웠어. 손짓 한 번으로 이 보리밭을 일구고, 그 다음엔 봐 봐, 밤하늘에 별과 달을 수놓았지. 하지만 아무리해도 생명을 만들 수는 없었어.”

다시금 슬픔을 머금은 얼굴로 그녀는 읊조렸다.

“나비조차 없는 세상이야.”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

눈에는 물기가 고였지만, 개의치 않는 것처럼 밝은 목소리로 내게 말해주었다.

“무엇이라도, 네 이야기를 해줘.”

나는 말을 이어나갔다. 내 고향, 내 어린 시절, 우리 부모님. 아 그리고 학교 이야기도. 그녀는 자신이 기억하지 못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맑은 눈망울을 반짝이며, 추임새를 아끼지 않았다.

“와, 진짜? 그건 좀 바보 같은데?”

“아냐, 좀만 더 들어봐, 진짜 그땐 진지했다니까.”

“그래 좋아, 그래서?”

진심을 내려놓는 이야기 속에 나와 그녀의 목소리는 커져갔지만, 나는 그녀와 보리밭이 뭔가 아지랑이처럼 흐릿해지는 듯한 기분을 받았다. 내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챈 그녀는 내 어깨를 잡아 흔들었지만, 아침이 나를 보리밭에서 끌어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 하고 대화를 마치지 못 한 아쉬움에 사로잡혀있었다. 매듭을 짓지 못한 찝찝함이었지만 난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조금 아쉬운 기분, 조금 가벼운 기분. 또, 이 꿈을 오늘 밤 다시 꿀 것 만 같은 확신이 느껴졌다.

그 하루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언제나 보리밭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시선이 주택가 한편에 심어진 보리를 스칠때면 뒤이어 감람나무를 찾는 나를 볼 수 있었다. 그렇게 흘러가듯 하루를 보내고 침대에 누운 나는 설래임에 밤잠을 이루지 못 할 뻔 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선명해지는 보리밭에 그렇게 안도할 수 가 없었다.


하지만, 밝은 밤하늘 대신 먹구름이 끼어있었다. 나는 이상한 기분을 느끼며 그녀를 향해 뛰어갔지만, 그녀는 다리에 얼굴을 묻은 체 흐느끼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그녀는 내 말이 끝나고도 한참동안 눈물 흘리다가 말을 이었다.

“기억났어…….”

서럽게 울다가 지쳐버린 그녀를 위로하며 토닥이자, 그녀는 나를 부여잡고 비명처럼 눈물을 흘렸다. 잠시 후 진정이 된 그녀에게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나와 동갑이었다, 멀리 떨어진 곳의 고등학교를 다니는. 어느 날, 그러니까 바로 그 날. 하굣길에 갑작스레 자동차가 빠른 속도로 그녀를 덮쳤다. 아마 그녀의 이야기가 맞다면, 지금쯤 중환자실에서 전선에 덮혀있겠지.

“어떻게 하지, 엄마, 아빠…….”

남을 위로해본적이 없는 나로서는 한기가 흐르는 그녀를 부여잡고, 그 슬픈 이야기를 들으며 터져버린 눈물을 같이 흘려주는 방법 외에는 어떠할 도리가 없었다. 그 식어가는 듯 한 몸에서는 뼈까지 시려오는 냉기가 느껴졌다. 그래도 꼭 끌어안을 수 밖에.


테이프가 끊어진 것처럼 잠에서 깨어났다. 추적추적한 새벽이었다. 다시 잠에 들 것 같지는 않은 애매한 시간이었다. 나는 불을 켜고 책상에 앉아 꿈에서 들은 이야기들을 정리했다. 그녀의 이름, 지역, 고등학교.

어제처럼 보리밭 생각은 계속 낫지만, 그녀의 슬픈 사정을 알기에 금요일 하루정도는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그녀를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기적인 욕심인가 싶으면서도 또 다시 그녀를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내가 위로를 해줘야할 것 같아. 나는 기대감 반 애석함 반으로 침대에 누었다, 그리고 나른해질 즈음 설래임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짹짹 거리는 참새소리가 들렸다. 빗소리. 나는 잠에 들지 못 한 것인가 싶었지만 시계는 토요일 07시였다. 불안한 감정이 뇌리를 스쳤다.

‘무슨 고등학교라고 했었지?’

나는 노트에 적어둔 그녀의 이름과 고등학교를 찾아가리라 마음먹었다. 남이 보면 바보 같은 일이지.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들은 고등학교와 이름일 텐데, 주말 반나절과 차비를 써버린다는건.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일어나 지갑을 챙기고 터미널로 향했다. 30분을 기다리고서야 버스를 탈 수 있었다. 버스는 조금 시골인 듯 한 풍경을 향해 달려갔다. 덜컹 거리는 진동에 쪽잠이 달아나자, 나는 창밖에 풍경에 눈을 땔 수 없었다. 마치 꿈인 듯 한 드넓은 보리밭이 도처에 퍼져있었다. 그리고 확신했다. 그건 꿈이 아니었어.

작은 도시여서 그녀가 입원중일만한 병원은 한 군데밖에 없었다. 택시기사에게 나는 그 곳으로 가달라고 부탁했다. 가슴에 왠지 모를 중압감이 느껴졌다. 정문에 내리자 나는 무거운 발걸음을 때며 병원으로 다가갔다. 지금이라도 도망가면 그저 해프닝으로 남을 텐데.

그래 맞아, 그냥 그때 되돌아갔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그녀가 말한 고등학교로 향했다. 잠긴 문을 피해 몰래 담을 넘어 들어간 교정은 적막함만 감돌고 있었다. 3학년 2반. 문은 어설프게 잠겨있었다. 그리고 나는 꽃다발이 놓인 책상 앞에 섰다. 그 이름. 그리고 그 얼굴.

택시를 기다리며 꺽은 보리를 책상에 내려놓고 등을 돌렸다. 하늘은 누군가 그을른것처럼 시커메서 곧 비가 내릴 것만 같았다.

이후로도 꿈에서 그녀를 만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굳이 글로 남기는 이유는, 그냥.

잊어버릴 것만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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