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8. 22.

조화로운 삶 을 읽고

  1. 왜 그들은 버몬트 숲으로 향했나?

  2. 시골로 가니 희망이 있었다.

  3. 노예는 두 번 찌른다.

 


1. 왜 그들은 버몬트 숲으로 향했나?

<자료사진 - 본문과 관련이 있음>


1929년과 그 일련의 사건들을 우리는 대공황이라고 부른다. 자본주의가 약속해온 영화는 쿠키 한 조각 남기지 않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사람들은 이루어 말할 수 없이 깊은 실의에 빠졌다. 그 자리에는 스코트 니어링도 있었다.

니어링은 1917년, 반전(反戰) 논문을 발표했다는 이유로 기소당했다. 배심원들은 그에게 무죄를 평결했지만, 당시의 미국 사회는 모난 돌을 남겨둘 생각이 없었다. 교수직을 떠나게 된 니어링에게는 간첩혐의까지 따라붙었다.

다시 돌아온 1929년, 스코트 니어링의 눈에는 흔들리는 사회의 현실이 보였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고, 그 곳에서는 더 이상 아무런 희망도 찾을 수 없었다. 대안을 찾아야만 했다.

그래서 그들은 버몬트 숲으로 향했다.


2. 시골로 가니 희망이 있었다.


<자료사진 - 본문과 관련이 없음>



니어링 부부는 조화로운 삶(Good Life)을 살기 위하여 시골로 향했다. 그렇다면 조화로운 삶은 무엇인가? 니어링은 대척점으로써 당시의 미국 사회를 표현했다: 이 체제를 그냥 받아들인다면 당신은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들고 힘있는 자를 더욱 힘세게 만들기 위해 돌아가는,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돌아가는 무자비하고 냉혹한 기계의 힘없는 톱니바퀴가 될 것이다. 그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을 것이다.

조화로운 삶이란, 경쟁을 일삼거나 탐욕스럽지 않은 삶. 누군가를 착취해야만이 살아갈 수 있는 체제로부터의 피난처요, 현대문명의 대안이다. 그래서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문명의 이기를 거치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려 했다. 집은 주변의 석재를 이용하여 지었고, 시멘트를 만들기 위해서 인근의 자갈을 사용했다. 식사는 텃밭을 통해 해결했고, 필요한 것이 있다면 설탕 단풍나무에서 채취한 단풍시럽으로 교환해왔다. 애덤스미스가 보기에는 마땅하지 않은 꼴이다.

우리는 분명 소비를 통해 사회의 이득을 증대시킨다. 도심은 이러한 소비의 중심지이다. 우리가 대파 한 단을 사올 때, 그 대파는 산지에서 서울의 공판장으로 운송되고 경매를 거처 마트의 물류센터로 갈 것이며, 직원들의 손을 거처 진열되고, 우리는 그것을 사온다. 버스를 타고 말이다. 7천원 짜리 대파 한 단에는 무수한 사람들의 이윤이 담겨있다.

하지만 시골에서는 그저 텃밭에 있는 대파 하나를 쭉 뽑아 흙을 탈탈 털면 될 일이다. 사회의 대차대조표는 사악하게 부풀어오르지 않는다. 그저 이렇게 끝날 뿐이다. 운송과정에서 발생하는 매연도, 격무에 지친 직원이 손에서 놓쳐 생긴 대파의 눌린자국도, 또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착취도 발생하지 않는다. 그저 이렇게 끝날 뿐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정밀해진 분업체계는 하나라도 멈추어 버리면 제 스스로 무너져버린다. 우리가 아무리 대파가 필요하더라도 고유가로 버스가 멈추거나 마트가 파업할 수도 있다. 심지어는 요소수가 부족해 트럭이 출발도 못하거나, 타산성을 이유로 농부가 대파농사를 포기할 수도 있는 일이다. 이 모든 일이 차례대로 일어날 수도 있다. 그것이 1929년의 대공황이다.

하지만 이런 체제가 유지되는데에는 이유가 있다. 자본주의의 덕목중 하나인 효율성 덕분이다. 도심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작게나마 농사를 짓고, 또 그것을 다듬어서 다음 수확때까지 먹을 수 있도록 보관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그 대상이 대파 하나가 아니라 우리가 소비하는 수 많은 식자재나 옷감이라면 가능 여부를 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런 연유로 자본주의는 수차례나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수차례나 일어섰다. 모두 일어서지는 못했다. 가난한 이들은 더욱 가난해졌다. 부자는 더 크게 일어섰으며, 힘있는 자들은 책임지지 않았다. 우리를 통해 유지되는 자본주의가 정작 우리같은 소시민들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진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3. 노예는 두 번 찌른다.

<자료사진 - 본문과 관련이 있음>


앞서 말했듯, 자본주의 사회가 소시민들에게 소비만을 강요하는 체제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를 완전히 떠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할당한 소비라는 업무를 태업할 수는 있다. 소비를 줄이는 목적이 저축이 아닌 태업이 될 때, 이것은 선택지로서 강력한 힘을 띄게 된다.

최후통첩게임이라는 것이 있다. 정해진 돈을 제안자가 비율을 정하여 수용자에게 나누어준다. 이때 수용자가 거부하면 두 사람 모두 돈을 받을 수 없다. 합리적으로 보면 제안자가 9:1이라는 말도 안되는 비율을 제시하더라도, 수용자는 아예 안 받는 것 보다는 받는 것이 좋다. 빈 손으로 게임을 끝내는 것 보다는 부스러기라도 받는게 낫지 않은가?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에서 수용자는 불공평한 제안을 거부했다. 수치상으로는 8:2 미만의 분배는 대부분 거절당했다. 이 결과는 명확하다. 사람은 작은 이득보다는 공정을 원하는 것이다. 중국의 탕평운동이나 한국의 N포세대, 더 거슬러 올라간다면 죽창드립과 최근에는 이재명 드립까지... 그 근본에는 이러한 착취에 대한 수동적 거부, 즉 배째라의 논리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대로 갈 것인가, 아니면 되돌아 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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