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 26.

세 번째 음식

나에게는 먹어보고 싶었던 음식이 세 가지 있었다. 하나는 맘모스 고기였다.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만화 속의 주인공이 얼마나 맛있게 먹던지! 내가 그것을 단념한 것은 '맘모스는 이미 멸종했으며 사라진 것은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 는 사실을 깨달은, 조금은 더 아이에서 멀어진 어느 가을밤이었다.

두 번째 음식은, 만화고기였다. 당시 학교에서는 원피스가 유행이었다. 루피가 뜯어먹던 엄청난 크기의 만화고기는 브라운관에서 튀어나오려는 것 같았다. 내 학창시절 우연히 보았던 믿지 못할 육질. 이 세상의 맛을 다 줄 것 같은 매혹적인 비주얼. 내게 꿈을 심어주었다.

세 번째 음식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다.


만화고기를 먹고 싶다는 마음으로 수 많은 연습장을 만화로 채우던 나는, 어느덧 고등학교에 접어들어서 미술부에 들어와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고작 연습장이 몇십 개 더 늘었을 뿐인데, 나는 친구들과 미대 입시를 위해 밤을 새우는 신세가 되었다.


그중에 한 명이, 내 첫사랑. 경화였다. 경화는 자연스러운 흑갈색 머리카락이 흐르던 여자애였다. 머리카락에 반해 고백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같이 밤을 새우던 날들이 늘어가고 서로 부딪힐 일들이 많아지자, 3학년에 이르러서는 어느새 모두가 우리를 커플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야.”

경화는 자기 작품에서 눈을 떼지 않고 나에게 물었다.

“왜?”

“너 세 번째 음식은 말 안 해줬잖아.”

“아, 맘모스고기랑 만화고기 다음?”

“세 번째건 먹을 수는 있는 거지?”

나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다행히도 세 번째 음식은 먹을 수 있고 실제로 존재하는 음식이었다.

“코코넛.”

“코코넛? 그 열대과일?”

“너도 못 먹어봤지? 무한도전에서 먹는 거 봤어? 막,”

나는 코코넛을 잡은 것처럼 허공에 손을 들어 야자수를 마시는 듯한 마임을 했다. 경화는 그런 나를 보고 털털한 웃음을 지으며 자기 배를 잡았다.

“하하하! 나도 봤어, 엄청 맛있게 마시던데.”

적의 없는 미소, 나는 저 순수한 미소에 반했던 것 같다.

“그치? 진짜 한 번 먹어보고 싶다. 완전 천상의 맛이겠지?”

"그래, 나도 한 번 먹어보고싶다."

그 뒤로부터 나와 경화는 데이트를 나갈 때마다 코코넛을 파는 가판대가 있나 없나를 살펴보았던 것 같다. 경화도 내 꿈에 공감해주었다. 비록 맘모스고기나 만화고기는 먹을 수 없을지언정, 코코넛은 한 번쯤 먹어볼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코코넛을 파는 곳은 그 당시만큼은 많지 않았고, 대부분의 데이트는 편의점에서 코코팜을 사서 마시며 끝날뿐이었다. 애석하기도 했지.


시간이 흐르고 겨울이 찾아왔다. 입시가 끝나고 미술실이 적막에 잠들었다. 나는 경화와 함께 쓴 대학 입시에 실패했다. 몸살 기운은 실기시험날 나를 궁지로 몰아갔고, 나는 지쳐버렸다. 결국, 하향지원을 하고 말았다. 경화는 합격했지만, 나를 따라서 하향지원을 했다. 그 날은 나 자신이 너무나도 작게 느껴져서, 전화도 받지 않고 울어버렸다.

나는 그때부터 슬럼프에 빠졌다. 무언가를 그려야 한다는 의무감은 있었지만, 도저히 그려낼 자신이 없었다. 타블랫 앞에 앉아서 무언가를 끄적거리더라도, 10분이 지나기도 전에 Ctrl + Z를 두들길 뿐이었다.

미안했다. 나 때문에 좋은 대학교를 버리고 하향지원을 해준 경화에게 너무 미안해서 울고만 싶었는데, 그런 나를 끌어안아 주는 경화의 품 안이 너무나도 따뜻했다.

“왜 그래, 새 학기부터.”

“미안해서.”

“됐어, 됐어. 거긴 등록금 비싸서 안 간 거야. 미안하면 벚꽃 필 때 대공원에 같이 가자. 지하철 타고 좀만 가면 된대.”

나를 바보로 알아, 거기 갔어도 장학금은 받았을 텐데. 하지만 그 맑은 눈에 나는 속을 수 밖에 없었다. 미소를 지어야지.

“그래, 같이 가자. 너 오므라이스 좋아하지? 내가 해갈게.”

“아이구 기특해!”

아직은 쓰러질 수 없어.


벚꽃이 핀 대공원은 졸업을 앞둔 과대 누나의 포트폴리오에서 본 일러스트처럼, 믿을 수 없이 잘 그려낸 하나의 환상 같았다. 하지만 내 왼팔을 붙잡은 그 따스한 감촉이, 이 모든 게 현실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우와! 이 구도, 사진 찍어가서 꼭 써먹자!”

경화는 여기저기 사진을 찍어대다가, 공원을 돌아다니는 청소부를 붙잡고 부탁을 했다.

“저기요. 오빠, 오빠! 우리 사진 좀 찍어주세요.”

나는 그런 경화에 이끌려서 어느 흐드러지는 벚꽃 아래에서 어색하게 사진을 찍었다.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내 인생에 다시 없을. 아름다운 사진이었다.

그때, 왜 그렇게 밝게 웃었어?

“나 좀 봐, 나 좀 봐. 나 완전 벚꽃잎에 파묻힌 것처럼 찍혔다. 이쁘지?”

벚꽃과 바람이 만든 우연의 걸작을 보며 깔깔대고 있을 때 즈음, 나는 저 멀리서 볼 수 있었다. 코코넛 파는 가게를. 내 가슴속에는 불꽃이 일었다.

“어! 저기 코코넛 판다!”

나는 경화의 손목을 잡고 코코넛을 파는 가판대로 달려갔다. 정말 신이 났었다.

가판대에 붙은 가격은 좀 비싼 가격이었다. 지금이라면 눈 감고도 살 수 있지만, 그때는 돈 나갈 데는 많고 들어오는 데는 적은 대학교 새내기였으니까. 내가 망설이고 있을 때, 경화는 지갑을 열며 말했다.

“그냥 내가 하나 사서 나눠 먹자.”

마침 코코넛 장사가 잘 되었는지, 코코넛도 딱 하나만 남아있었다. 돈을 받아든 상인은 시퍼런 칼을 들어 코코넛을 여기저기 두들기더니, 마침내 구멍을 내었다. 그는 빨대를 꽂은 코코넛과 잔돈을 경화에게 돌려주었다.

“감사합니다!”

경화와 나는 발걸음을 저 멀리 있는 벤치를 향해 옮겼다. 그녀는 신기한 듯 코코넛의 여기저기를 만져보았다. 까끌까끌한 감촉이 기묘하다고 말했다.

“내 돈이니까 내가 먼저 마셔봐도 되지?”

“그럼, 나는 네가 쓴 빨대로 먹어봐야겠네.”

“침 묻힐 건데?”

하며 경화는 입술 끝으로 빨대를 물었다. 봄의 햇빛을 받아 속이 비치는 빨대에는 조금씩 올라오는 야자수가 보였다. 이윽고, 야자수가 경화의 입에 다다르자 경화는 오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어때, 어때? 무슨 맛이야?”

경화는 얇은 검지손가락을 뻗어 보였다. 잠깐만 기다려 달라는 뜻이겠지.

“음, 이거 생각보다 맛있네.”

“진짜? 나도 한 번 먹어보자.”

“시른데?”

입꼬리를 귀에 닿을 듯 올린 경화는 나를 약 올리는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나는 이 장난기 많은 여자의 야자를 어찌 얻어먹을지 고심이었다.

“아 왜, 내가 업어줘도 안 돼?”

“응 안 돼.”

“아 좀! 오므라이스 매 주 해줄까?”

“아... 그래도 안 돼.”

경화는 온갖 감언이설에도 넘어가지 않고, 그 야자수를 다 먹어버렸다. 한편으로는 서운했지만, 찰싹 달라붙는 애교에 나는 미워할 수가 없었다.

“그걸 그렇다고 다 먹냐? 이 돼지야.”

“맛있는데 오또케.”

“으, 애교떨지마. 소름 돋아.”

내가 소름 돋는다고 말하자, 경화는 내 팔뚝을 때렸다. 그림도 잘 그리지만, 손 맵기로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최고였다. 그러면서도 내 왼팔을 붙잡는데, 내가 어떻게 뭐라고 할 수 있을까?

봄과 여름은 그렇게 쏜살같이 지나갔다. 가을은, 막을 수 없었다.


나는 보았다. 벚꽃을 머금은 그녀의 사진을, 국화 무더기 한가운데에서.

경화의 오빠와 맞절을 하고 나오던 순간까지도 나는 꿈속에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곳을 빠져나오고 싸늘한 바람이 내 왼팔을 잘라낼 것처럼 스쳐 지나가자, 나는 이 모든 게 현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갈 곳이 없었다. 그저 그렇게 장례식장을 빠져나와, 나는 어디론가 걷고 있었다. 트레일러가 내 곁을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나도 도로로 몸을 던지고 싶었다.

나는 편의점에 들렀다. 제정신으로는 잘 수 없었으니까. 흐릿해지는 기억 속에서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기억은, 변기를 붙잡고 있던 나였다.

아침은 서럽게 찾아왔다. 나는 꿈에서 깨고 싶지 않았다. 머리는 깨질 것 같고, 속은 뒤집히는 것 같았다. 비틀거리며 책상에 기대었지만, 나는 이내 무너져내렸다. 책상에 걸쳐져 있던 빈 소주병이 바닥에 떨어져 깨졌다.

커튼 틈새로 스며드는 가을 햇볕을 받은 초록 조각들이 반짝였다. 모든 조각 하나하나가 경화와의 추억이 되어, 나를 괴롭힌다. 나는, 기억 조각을 잡았다.

운명처럼 잡은, 경화와의 마지막 기억은 날카로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그저 떨리는 손목과 날카로운 조각.

내 손목에는 초록색 조각과 보색을 이루는 염료가 흐르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깊게.

나는 유리 조각을 던져버렸다. 조각에 묻어있던 핏방울들이 벽지에 튀겼다. 이대로 있다가는 미쳐버릴 것 같아서 나는 방에서 뛰쳐나갔다.

하지만 나는 고작 일시적인 두려움으로 뛰쳐나왔을 뿐, 의지해야 할 무엇도 없었다. 술 한 병을 더 사러 편의점으로 들어간 나는, 우연히 볼 수 있었다.

코코넛 워터, 비록 벚꽃 아래의 코코넛처럼 생기진 않았지만, 현대적으로 포장되어있는 코코넛워터. 찰나의 순간, 경화와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너도 미술부야?’

‘나, 야자수는 한 번 마셔보고 싶더라.’

‘경화야 사랑해.’

‘그걸 그렇다고 다 먹냐? 이 돼지야.’

‘진짜 맛이 어땠냐니까?’

‘경화야, 왜 연락을 안 받아. 오므라이스 해줄게.’

‘경화야?’


그 짧은 흑백영화가 끝났을 때, 나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홀린것처럼 코코넛워터를 잡았다. 차가운 감각이 느껴졌다. 나는 비틀거리며 편돌이 앞에 서서 던지듯 잔돈을 건냈다.

나는 다시 방안으로 들어왔다. 코코넛워터를 들고서. 다시 한번 초록 유리 조각 앞에 앉은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코코넛워터의 포장을 뜯었다. 대체 얼마나 맛있었길래, 경화는 그걸 한 입도 안 주고 다 먹었을까?

나는 한 모금을 마셨다.

걸래 빨은 물의 맛이 났다. 이게 뭐야? 이걸 먹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어. 경화는 대체 이걸 왜 다 먹은 거지? 이게 뭐라고 나한테는 한 입도 안... 아.

나 먹이기 싫어서, 네가 다 먹은거구나?

내가 실망할까봐. 세 가지 음식 중에서 유일하게 먹을 수 있는 코코넛에서는 쓰레기같은 맛이 났으니까. 그걸 네가 다 먹은 거구나. 돼지 소리 들어가면서.

나는 흐느끼면서 웃고 있었다. 내 환상 하나 지켜주겠다고, 이 맛대가리 없는걸 지 혼자 다 쳐먹었네. 이 멍청아, 이러면 내가 포기할 수가 없잖아.

나는 떨리는 두 손으로 코코넛을 들었다. 그 탁한 과즙 속에는 내 젖어버린 흑갈색 눈이 비치었다. 마침내 다시 한번 더 코코넛을 기울이자,


따듯한 봄바람이 불어오고 벚꽃이 휘날리며, 그림처럼 경화가 내게 다가와 입을 맞추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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